10일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11일 오후 2시 도쿄 자민당사에서 이번 선거를 평가하고 향후 정책 방향을 밝히는 기자회견에 나섰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탁월한 리더십과 행동력을 가지고 일본을 이끌어온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숨지는 충격적 사건이 있었다. 그가 특히 정열을 기울여온 헌법 개정 등의 난제에 대응해 가겠다.”
10일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11일 오후 2시 도쿄 자민당사에서 이번 선거를 평가하고 향후 정책 방향을 밝히는 기자회견에 나섰다. 자민당은 선거가 치러진 전체 125석(총 248석) 가운데 단독 과반을 넘긴 63석,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13석을 얻었다. 전날 선거를 치르지 않은 의석을 포함해 참의원 내 두 당의 의석은 146석(58.9%)으로 과반수, 개헌에 찬성하는 다른 두 야당인 일본유신회·국민민주당 등까지 합치면 177석으로 개헌 발의가 가능한 3분의 2 의석(166석)을 여유롭게 넘겼다. ‘역사적 대승’을 거뒀지만, 선거를 이틀 앞두고 불행하게 숨진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생각해서인지, 회견이 이어지는 40여분 내내 기시다 총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일본 우익의 구심점’ 구실을 해온 아베 전 총리가 사라진 뒤 일본은 어디로 나아가게 될까. 이날 회견에서 기시다 총리는 향후 일본이 나아갈 방향을 비교적 분명하게 밝혔다.
먼저 ‘초미의 관심사’인 개헌에 대해선 아베 전 총리가 정열을 기울여온 과제라는 사실을 거듭 밝히며 가을 임시국회부터 본격적인 개정 작업에 나서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기시다 총리는 “헌법 개정은 자민당이 만들어진 뒤부터 당시(당의 기본 방침)였으며 이번 선거에서도 ‘조기 실현’을 공약으로 내세워 싸웠다”며 “개헌을 실현하기 위한 국회 논의를 이끌어 가겠다. 가을로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이번 선거 때 드러난 민의를 이어받아 여·야당이 한층 활발한 논의를 진행하기를 강하게 기대한다”고 말했다.
개헌의 범위를 두고선 2018년 3월 자민당이 공개한 4개 항목 모두가 “현대적인 과제”라고 밝혔다. 네 항목 가운데엔 일본의 교전권과 군대 보유를 금지한 평화헌법의 핵심인 ‘9조’를 바꿔 자위대의 존립 근거를 명기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9조도 개정 대상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나아가 “개헌은 최종적으로 국민들이 정하는 것이므로 전국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집회를 열면서 국민의 이해를 얻기 위한 활동에도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가을 임시국회에서 9조 개정 등을 적극 논의하고, 여론 환기를 위해 대국민 설득에도 나설 것으로 보인다. 다만, “헌법 개정에 찬성하는 3분의 2 의석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3분의 2의 찬성을 결집해야 한다”며 개헌 세력 안에서도 의견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다 해도, ‘개헌의 조기 실현’을 내건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데다 ‘개헌에 정열을 기울여온’ 아베 전 총리의 후광까지 겹쳐,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를 상징하던 일본 헌법의 운명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됐다.
또 다른 관심사인 군비 증강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추진한 노선을 계속 유지한다는 방침을 확인했다. 기시다 총리는 “반격능력(일본이 직접 북한과 중국 등의 적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 등을 배제하지 않고 연말에 새로운 국가안전보장전략 등을 책정해 일본의 방위력을 5년 이내에 근본적으로 강화해 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1% 정도인 방위비(5조4005억엔)를 ‘5년 이내 2%로 올린다’는 구체적인 수치 목표를 두고선 “방위비 증액은 무엇이 필요한지 내용과 예산·재원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며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이에 맞서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 아베 전 총리의 측근들은 “아베 전 총리의 유지는 헌법 개정과 국방력 강화”라며 ‘방위비 2%’라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하반기 정책 추진 과정에서 자민당 강온파 등 내부에서 상당한 진통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시다 총리는 그밖에 임금 인상 등 분배를 강조하는 자신의 간판 정책인 ‘새로운 자본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코로나19와 물가 문제에도 철저히 대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를 위해 하반기엔 식품·에너지 등 물가 급등에 대한 대책도 발표한다.
아베 전 총리의 불행한 죽음이 일본 우경화의 ‘방향’을 결정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 ‘속도’를 가속화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회견 내내 우크라이나 전쟁과 그로 인한 물가 급등 등을 언급하며 “지금 우리는 중요한 전환점에 있다”, “포스트 냉전 이후 시대에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이를 위해 일본이 택한 길은 개헌과 군비 증강을 통해 중국·러시아·북한 등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지금 일본 앞엔 여러 커다란 과제가 겹쳐 있다. 우린 전후 최대의 난국 앞에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평시가 아닌 이른바 유사시의 정권 운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과 이웃해 살아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 예의 주시해야 할 ‘처절한’ 현실 인식이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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