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포럼에 참석한 각국 외무장관들이 회의 개막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백남순 북한 외무상(뒷줄 가운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을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가운데)이 지나고 있다. 쿠알라룸푸르/AP 연합
아세안지역포럼 북·미 태도 변화 없이 끝나
중 무력감 비쳐…성격 모호 10자회동만 결실
중 무력감 비쳐…성격 모호 10자회동만 결실
아세안지역포럼(ARF) 기간엔 아무런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결의 1695호 채택으로 가뜩이나 긴장된 동북아 정세에서, 이번 회의가 외교적 해법 모색의 계기가 되리란 한가닥 기대는 어긋났다. 북한의 6자 회담 복귀도, 비공식 6자 외무장관 회담도, 남북 외무장관 회담도 모두 무산됐다. 대신 미국 주도의 ‘대북한 압박’으로 보이는, 모호한 성격의 ‘10개국 외무장관 회동’만 이뤄졌다.
북한은 모든 걸 거부했다. 미국은 고장난 레코드판이 돌아가듯 기존의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다. 한국과 중국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졌다.
평행선을 달린 북-미=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북한에 “조건과 유보 없는 6자 회담 복귀”를 요구했다. 백남순 북한 외무상은 “제재 모자를 쓰고는 6자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맞받았다. 지난해 11월 5차 6자 회담 이후 계속돼 온 양쪽의 기존 태도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 다른 어떤 유보도 없었다. 미국은 포위망을 좁히는 사냥꾼 같았고, 북한은 가시를 곧추세운 고슴도치와 다를 바 없었다.
8자에서 10자로 확대된 까닭=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은 28일 아세안지역포럼 오전회의 때 “뉴질랜드와 인도네시아도 참여하고 싶어한다”며 ‘10개국 외무장관 회동’으로 하자고 제안해, 라이스 장관의 동의를 얻어냈다. 한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최후의 순간까지 북한의 대화 테이블 복귀를 설득해 보려는 중국의 고심의 결과로 보인다”고 평했다. 회의 참가국이 많아질수록 회의체의 성격이 모호해지는 측면을 고려한 선택이다. 리 외교부장은 이날 오후 만난 백 외무상에게 ‘10자 회동’ 참여를 요청했으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리 부장은 오전 회의 때 취재진에 “정상적 관계가 특수 관계보다 나을 때도 있다”며 답답함을 내비쳤다. 북한과 특수 관계라는 중국의 무력감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남북 외무장관 회담 무산=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이날 오전 아세안지역포럼 오전 회의 도중 백남순 외무상에게 직접 남북 외무장관 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2004년과 2005년에도 남북 외무장관이 만났고, 요즘 정세가 어려우니 대화를 하는 게 어떠냐는 취지였는데, 백 외무상은 “북남관계는 6·15 공동선언에 따라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거부했다. 이 또한 외교와 민족문제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북한의 공식 어법이다. 북쪽으로선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해제와 북-미 양자협의에 맞춘 초점을 흐릴 생각이 없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왜 이렇게 상황이 어그러졌나?=북한은 아직 협상 자리에 나올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조선식 정세인식’에 따른 그들의 셈법으로 본다면, ‘미사일로 얻은 건 아직 없고, 고립으로 더 잃을 것도 없다’는 자세다. 안보리 결의 찬성 때문이었는지, 중국은 그동안 북한을 상대로 해오던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한국은 갖은 외교 노력에도 손에 쥔 것 없이 돌아가야 했다. 미국은 느긋하다.
이를 두고,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당장 무슨 엄청난 충돌이 생기진 않겠지만, 한동안 어수선한 국면이 이어지며 활로 모색에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특히 6자 회담의 균형추 노릇을 해온 한국과 중국의 입지가 자꾸 좁아지는 게 심각한 문제”라고 덧붙였다. 쿠알라룸푸르/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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