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베이루트의 대폭발 사고 다음날인 5일(현지시각) 청년들이 폐허 정리 작업을 벌이고 있다. 베이루트/EPA 연합뉴스
레바논 정부가 4일(현지시각) 5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베이루트 항구 대폭발의 원인으로 지목된 질산암모늄의 부실 관리 책임 규명에 착수했다.
레바논 정부는 5일 긴급 각료 회의를 연 뒤 “군 지도부에 질산암모늄 저장 업무를 담당한 베이루트 항구의 직원 모두를 가택 연금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보도했다. 레바논 정부는 항구의 창고에 저장된 질산암모늄이 가열돼 폭발하면서 대참사가 벌어진 것으로 잠정 판단하고 있다.
중동 지역 언론들은 폭발하기 쉬운 인화성 물질이 시내와 가까운 항구 창고에 대량으로 보관됐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 기득권층의 구조적인 부패가 근본 원인일 수 있다고 점쳤다.
하산 디아브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베이루트 항구 창고에는 약 2750t의 질산암모늄이 아무런 안전 대책 없이 6년간 보관돼 있었다”면서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하마드 하산 레바논 보건부 장관은 베이루트 폭발 사망자가 135명, 부상자가 약 5천명으로 각각 늘었다고 밝혔다. 하산 장관은 아직 수십명이 실종 상태라고 덧붙였다. 또 마완 아부드 베이루트 주지사는 사우디아라비아 방송 <알하다스>와 인터뷰에서 “폭발 피해액이 100억~150억 달러(약 12조원~18조원)에 달할 수 있다”며 “거의 30만명이 머물 집이 없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사태 수습을 위한 각국의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6일 레바논을 직접 방문해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 등과 지원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전했다. 독일도 47명으로 이뤄진 구조팀을 최대한 빨리 현지로 출발시킬 예정이라고 <데페아>(dpa) 통신이 보도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이날 디아브 레바논 총리와 통화하고 애도의 뜻을 표시한 뒤 사태 수습 과정을 돕겠다고 밝혔다.
한편, 테러 가능성과 관련해 미 국방부 고위 관리와 미 정보기관 요원은 “폭발이 특정 국가나 세력의 공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징후가 없다”고 밝혔다고 <에이피>는 전했다. 두 사람은 위험 물질을 잘못 관리하다가 사고가 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폭발 물질 관리와 관련해, 베이루트 세관이 질산암모늄의 위험성을 거론한 2017년 문서로 추정되는 문건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면서 이번 사건이 관리 소홀에 따른 ‘인재’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세관 관리가 법원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 이 문서는, 2013년 베이루트에 도착한 선박에서 압수한 질산암모늄이 방치되고 있다며 질산암모늄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문서는 2013~2016년 5번에 걸쳐 비슷한 내용의 문서를 발송한 바 있다고 언급했다.
이 문서가 실제로 세관이 보낸 것으로 확인될 경우, 레바논 고위 관리들이 잘산암모늄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몇년째 방치하다 대참사를 불렀다는 비판이 제기될 전망이다. 여러 정파간 책임 공방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다. 일부에서는 무장 세력인 헤즈볼라가 사실상 항구를 통제하고 있다며 헤즈볼라 책임론을 흘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 레바논에서 몇년동안 활동한 로버트 베어 전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은 <시엔엔>에 “어느 조직의 소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군사용 폭발물이다”라며 “단순히 질산암모늄 같은 비료는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