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총리 ‘관리부실 사고’ 시사 트럼프는 “사고 아닌 끔찍한 공격” 이스라엘·헤즈볼라 “무관” 선그어 공격으로 밝혀지면 중동 큰 전운
레바논 베이루트 폭발 현장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 4일(현지시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항구의 대규모 폭발 현장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소방헬기가 진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베이루트 AFP/연합뉴스
지중해 연안 중동 국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4일(현지시각) 대규모 폭발이 벌어져 4천명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폭발 순간, 원자폭탄이 터진 것 같은 버섯구름 모양의 연기가 도심 위로 치솟아 오르고, 규모 4.5의 지진과 맞먹는 충격으로 도시가 뒤흔들리며 순식간에 사방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레바논 정부는 사고 직후 항구 근처 창고에 적재돼 있던 2750t 규모의 질산암모늄에 대한 관리 소홀로 인한 사고 쪽에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끔찍한 공격”이라고 밝히며, 사고 원인을 놓고도 혼선이 빚어졌다.
폭발은 이날 오후 6시 조금 넘어 베이루트 항구에서 진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며 시작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유포된 동영상에는 항구의 한 창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다가 순식간에 엄청난 폭발이 발생하는 모습들이 담겨 있다. 도시는 이후 단 몇초 만에 초토화돼,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주검들이 가득했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전했다.
레바논 적십자는 5일 이 폭발로 최소 100명이 목숨을 잃고 4천명 이상이 다쳤다며, 현장에서 여전히 구조·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요르단 지진관측소는 이날 폭발이 규모 4.5의 지진과 맞먹는다고 추정했다. 폭발로 인한 충격파로 10㎞ 거리에 있는 건물의 유리창까지 박살 나고 지중해 넘어 200㎞ 떨어진 키프로스에서도 진동이 감지될 정도였다.
레바논 역사상 최악의 사태로 꼽힐 만한 이번 폭발의 원인을 두고서는 말이 엇갈리며 논란이 커지고 있다. 하산 디압 레바논 총리는 사고 직후 “질산암모늄 약 2750t이 2014년 한 화물선에서 압수된 후 항구 주변 창고에 6년간 무방비 상태로 보관돼 있었으며, 이곳에서 폭발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농업용 비료인 질산암모늄은 가연성 물질과 닿으면 쉽게 폭발하는 성질을 갖고 있어 화약 등 무기 제조의 기본 원료로도 사용되는데, 관리 부실로 인해 사고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폭발을 ‘공격’으로 규정했다. “우리의 위대한 장군들 몇명과 만났는데 그들은 일종의 제조 과정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가 아니라고 느끼는 것 같다”는 설명이 전부였지만, 최근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 정파인 헤즈볼라와 이스라엘군이 국경지역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있어 긴장이 고조되던 터라 논란이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게다가 이번 사건은 유엔 특별재판소가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는 헤즈볼라 대원 4명에 대한 판결을 사흘 앞두고 일어났다.
일단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모두 이번 폭발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선을 긋고 있다. “현재까지 베이루트 폭발이 공격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국방부 관리의 말이 <시엔엔>(CNN) 방송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말대로 이번 폭발이 이스라엘이나 헤즈볼라의 ‘공격’으로 밝혀질 경우 중동에 커다란 전운을 몰고 올 수도 있어, 폭발 원인 조사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편, 레바논 정부는 베이루트에 2주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사태 수습을 위해 1천억레바논파운드 규모의 긴급 예산을 배정하는 등 긴급 대응에 들어갔다. 미국을 비롯해 영국·프랑스·카타르·쿠웨이트 등도 줄줄이 원조를 약속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mari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