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
[창간기획] 전쟁과 평화
40여개 분쟁취재 정문태 기자가 본 ‘전쟁의 진짜 얼굴’
40여개 분쟁취재 정문태 기자가 본 ‘전쟁의 진짜 얼굴’
우리는 과연 전쟁의 참상을 알고 있을까? 이 의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우리는 흔히 전쟁의 참상을 영화적 상상력에 기대기 십상이다. 어떤 이들은 피가 흐르고 내장이 튀어나오고 살점이 떨어져 나뒹구는 전선을 떠올릴 테고, 또 어떤 이들은 잿더미로 변한 도시 한 귀퉁이를 헤매는 굶주린 피난민들을 그려볼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이들은 폭발음과 비명 같은 청각적 상징을 먼저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동안 40여개에 이르는 전쟁을 취재해 온 내 경험에 비춰볼 때 그런 상상들이 그리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전쟁의 참상을 그저 ‘피’나 ‘파괴’나 ‘죽음’ 같은 추상적인 단어로만 때운다면 ‘누가 진짜 희생자였는가?’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쳐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는 뜻이다. 실제로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는 듯 여겨왔지만, 늘 치명적인 희생을 강요당했던 두 대상을 지나쳐 버렸다. 여기 해묵은 경구를 통해 그 둘을 살펴보자.
첫째, “전쟁이 선포되면 진실이 그 첫번째 희생자가 된다.”
이건 정치인이자 반전운동가로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개입을 반대했던 아서 폰손비가 <전시의 거짓말: 제1차 세계대전의 거짓 선전>이란 책에 남긴 유명한 말이다. 제법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전쟁의 참상을 읽는 잣대로 유효하다. 1991년 미군과 그 연합군의 제1차 이라크 침공을 되돌아보자. 그 무렵 미국 국방부는 미사일이 이라크 목표물을 정밀 타격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시엔엔>(CNN) 같은 방송을 통해 뿌려댔고 온 세상 사람들은 안방에 앉아 환상적인 현대전을 감상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최소 희생자를 낸 현대적이고 깔끔한 전쟁이었다. 이제 베트남전쟁 악몽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며 축배를 들었다. 그 20세기 최대 거짓말에 나라 안팎 언론들은 넋 놓고 찬사를 보냈다. 미군은 43일 단기전에서 전의를 잃고 도망치던 이라크 군인 10만여명을 후미에서 공격해 살해했다. 그 침공 여파로 어린이 7만여명과 노인 7000여명을 비롯한 시민 11만여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건 인류 전사에서 최단 기간 최대 희생자를 기록한 전쟁이었다. 미군은 43일 동안 하루 평균 2497회 공습으로 히로시마형 핵폭탄 5배를 웃도는 각종 폭탄 8만8500t을 이라크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미군이 ‘비디오전쟁’을 통해 우쭐댔던 정밀탄 사용은 기껏 7% 남짓한 6250t뿐이었고, 나머지는 명중률이 30%에도 못 미치는 이른바 ‘멍텅구리 폭격’이었다. 해서 민간부문 피해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제1차 이라크 침공은 인류사에서 가장 전근대적인 전쟁으로, 가장 비인도적인 전쟁으로 기록해야 마땅함에도 미국 정부와 국제사회는 철저히 입을 닫았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서 진실은 그렇게 처절하게 살해당했다.
전쟁땐 2가지가 죽는다
‘진실’ 그리고 ‘못가진 자’ “최첨단 전쟁” 선전 이라크
정밀탄 7%뿐…시민 11만명 죽었고
“인도주의 폭격” 코소보
‘대량학살’ 명분부터 거짓이었다 요즘 한반도 전쟁몰이하는
‘가진 자’ 정치인·군인·언론…
자신은 안죽는다는 것 안다 내가 경험한 전장서
‘도덕적인 전쟁’ 따윈 없었다 2003년, 미군은 진실이 전멸한 땅 이라크를 다시 한번 마음껏 침공할 수 있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 정부가 대량살상무기(WMD)를 숨긴 채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고 있다며 제2차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미국은 이라크 군인 3만여명과 시민 7269명을 살해한 제2차 침공 끝에 눈엣가시였던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지만, 단 한발의 대량살상무기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사회주의 이념을 지녔던 이라크 정부와 이슬람주의를 내건 알카에다 연계설은 처음부터 코미디였고, 대량살상무기 존재설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렇게 전쟁은 늘 진실을 가장 먼저 살해했고, 그 진실을 깊이 파묻어버렸다. 만약 미군의 제1차 이라크 침공에서 진실이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면 제2차 침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99년 코소보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유고연방 일원인) 코소보에서 40만명이 학살당했다”며 ‘인도주의 폭격’(humanitarian bombardment)이라는 당치도 않은 신조어를 들이밀며 대유고슬라비아 공격을 외쳤다. 나토군은 유고 공습에서 군인 1000여명을 죽이는 동안 세르비아계 7000여명과 알바니아계 3000여명을 포함한 시민 1만여명을 살해했다. 이건 나토군이 유고를 공습하기 전 코소보에서 인종분쟁으로 알바니아계 1500여명과 세르비아계 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던 수치와 좋은 비교거리가 된다. 나토군의 인도주의 폭격이 오히려 몇 곱절 많은 시민을 살해했다는 뜻이다. 미군과 나토연합군이 최첨단 현대전을 자랑했던 코소보전쟁은 군인보다 시민을 더 많이 살해한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이었다. 나토가 단기전 계획으로 판을 벌였던 코소보전쟁은 예측이 빗나가면서 막대한 전비 조달을 놓고 참전국들이 애를 먹었다. 이미 전문가들은 한발에 100만달러짜리 크루즈미사일과 1만달러짜리 정밀탄 사용량이 전체 공습량의 20%에도 못 미칠 것이라며 일찌감치 민간인 대량 희생을 경고했던 바다. 결국 미군과 나토연합 폭격대가 공습을 시작하고 한달 만인 4월24일, 유고 정부가 밝힌 1만여건에 이르는 범죄적 공격 사례는 결코 우연도 과장도 아니었다. 종전 뒤 현장을 조사한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나토 공습 3만8000회 가운데 33%와 그 공습으로 발생한 사망자 50%가 모두 불법 공격 대상이었다’고 밝혀 앞선 유고 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렇게 나토연합군이 78일 동안 공습을 마치고 코소보를 점령했지만 토니 블레어가 말했던 40만명 학살설은 결국 공갈, 협박, 사기였음이 드러났다. 코소보 어디에서도 그런 대량 학살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듯 코소보전쟁에서도 진실은 어김없이 최초 희생자가 되었다. 둘째, “가진 자들이 전쟁을 일으킬 때 못 가진 자들이 죽는다.” 이건 베트남전쟁을 반대했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했던 말이다. 나는 지금껏 내가 경험한 그 어떤 전쟁에서도 가진 자들-그게 권력이든 돈이든-이 희생당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전쟁의 참상 속에서 도드라지는 피해자는 못 배우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늘 아이들과 여자들이 치명적 손상을 입는 걸 보았다. 달리 말하자면 권력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많이 배운 남자들은 전쟁에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조건을 가진 자들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도 지녔을 뿐 아니라, 사실은 전쟁을 만들어내는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전쟁을 선포하는 대통령과 총리는 말할 나위도 없고 무슨 장관에다 국장에다 한자리한다는 자들, 그 전쟁에 뒷돈을 대고 자본을 축적한 자들, 전쟁 나팔수 노릇을 한 학자나 언론인들은 모조리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몸들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전쟁들에서는 어김없이 그랬다. 그런 자들이 전쟁터에 있거나 죽음으로 내몰리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군인도 마찬가지다. 장군들이 죽는 전쟁을 본 적이 없다.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군인들도 모조리 못 배우고 힘없고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었을 뿐이다. 이런 내 경험에서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요즘 남과 북을 놓고 전쟁몰이를 하는 정치인, 군인, 학자, 언론인을 포함한 갖가지 전쟁광들은 자신들과 그 가족만은 전쟁의 참상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주 영리한 자들임이 분명하다. 예나 이제나 전쟁은 그렇게 진실을 첫번째 희생자로 삼아 결국은 가지지 못한 이들을 마지막 희생자로 몰아가는 파멸적 참상을 숨겨왔다. 전쟁의 피해자는 바로 나이고, 당신이고, 우리들이다. 반전주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전쟁은 누가 살아남았는지만 결정할 뿐, 누가 옳은지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세상에 공정한 전쟁, 도덕적인 전쟁 같은 건 없었다. 누가 전쟁을 외치는가? 누구를 위해 전쟁을 할 것인가? 왜 전쟁의 참상 속에 주인공이 되려는가? 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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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전쟁’ 따윈 없었다 2003년, 미군은 진실이 전멸한 땅 이라크를 다시 한번 마음껏 침공할 수 있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 정부가 대량살상무기(WMD)를 숨긴 채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고 있다며 제2차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미국은 이라크 군인 3만여명과 시민 7269명을 살해한 제2차 침공 끝에 눈엣가시였던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지만, 단 한발의 대량살상무기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사회주의 이념을 지녔던 이라크 정부와 이슬람주의를 내건 알카에다 연계설은 처음부터 코미디였고, 대량살상무기 존재설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렇게 전쟁은 늘 진실을 가장 먼저 살해했고, 그 진실을 깊이 파묻어버렸다. 만약 미군의 제1차 이라크 침공에서 진실이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면 제2차 침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99년 코소보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유고연방 일원인) 코소보에서 40만명이 학살당했다”며 ‘인도주의 폭격’(humanitarian bombardment)이라는 당치도 않은 신조어를 들이밀며 대유고슬라비아 공격을 외쳤다. 나토군은 유고 공습에서 군인 1000여명을 죽이는 동안 세르비아계 7000여명과 알바니아계 3000여명을 포함한 시민 1만여명을 살해했다. 이건 나토군이 유고를 공습하기 전 코소보에서 인종분쟁으로 알바니아계 1500여명과 세르비아계 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던 수치와 좋은 비교거리가 된다. 나토군의 인도주의 폭격이 오히려 몇 곱절 많은 시민을 살해했다는 뜻이다. 미군과 나토연합군이 최첨단 현대전을 자랑했던 코소보전쟁은 군인보다 시민을 더 많이 살해한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이었다. 나토가 단기전 계획으로 판을 벌였던 코소보전쟁은 예측이 빗나가면서 막대한 전비 조달을 놓고 참전국들이 애를 먹었다. 이미 전문가들은 한발에 100만달러짜리 크루즈미사일과 1만달러짜리 정밀탄 사용량이 전체 공습량의 20%에도 못 미칠 것이라며 일찌감치 민간인 대량 희생을 경고했던 바다. 결국 미군과 나토연합 폭격대가 공습을 시작하고 한달 만인 4월24일, 유고 정부가 밝힌 1만여건에 이르는 범죄적 공격 사례는 결코 우연도 과장도 아니었다. 종전 뒤 현장을 조사한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나토 공습 3만8000회 가운데 33%와 그 공습으로 발생한 사망자 50%가 모두 불법 공격 대상이었다’고 밝혀 앞선 유고 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렇게 나토연합군이 78일 동안 공습을 마치고 코소보를 점령했지만 토니 블레어가 말했던 40만명 학살설은 결국 공갈, 협박, 사기였음이 드러났다. 코소보 어디에서도 그런 대량 학살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듯 코소보전쟁에서도 진실은 어김없이 최초 희생자가 되었다. 둘째, “가진 자들이 전쟁을 일으킬 때 못 가진 자들이 죽는다.” 이건 베트남전쟁을 반대했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했던 말이다. 나는 지금껏 내가 경험한 그 어떤 전쟁에서도 가진 자들-그게 권력이든 돈이든-이 희생당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전쟁의 참상 속에서 도드라지는 피해자는 못 배우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늘 아이들과 여자들이 치명적 손상을 입는 걸 보았다. 달리 말하자면 권력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많이 배운 남자들은 전쟁에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조건을 가진 자들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도 지녔을 뿐 아니라, 사실은 전쟁을 만들어내는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전쟁을 선포하는 대통령과 총리는 말할 나위도 없고 무슨 장관에다 국장에다 한자리한다는 자들, 그 전쟁에 뒷돈을 대고 자본을 축적한 자들, 전쟁 나팔수 노릇을 한 학자나 언론인들은 모조리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몸들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전쟁들에서는 어김없이 그랬다. 그런 자들이 전쟁터에 있거나 죽음으로 내몰리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군인도 마찬가지다. 장군들이 죽는 전쟁을 본 적이 없다.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군인들도 모조리 못 배우고 힘없고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었을 뿐이다. 이런 내 경험에서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요즘 남과 북을 놓고 전쟁몰이를 하는 정치인, 군인, 학자, 언론인을 포함한 갖가지 전쟁광들은 자신들과 그 가족만은 전쟁의 참상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주 영리한 자들임이 분명하다. 예나 이제나 전쟁은 그렇게 진실을 첫번째 희생자로 삼아 결국은 가지지 못한 이들을 마지막 희생자로 몰아가는 파멸적 참상을 숨겨왔다. 전쟁의 피해자는 바로 나이고, 당신이고, 우리들이다. 반전주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전쟁은 누가 살아남았는지만 결정할 뿐, 누가 옳은지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세상에 공정한 전쟁, 도덕적인 전쟁 같은 건 없었다. 누가 전쟁을 외치는가? 누구를 위해 전쟁을 할 것인가? 왜 전쟁의 참상 속에 주인공이 되려는가? 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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