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차로 6시간을 가면 발틱해로 나가는 그단스크에 닿는다. 1980년대 폴란드 변혁운동의 구심이었고 1989년 동유럽 공산권 최초로 체제전환을 성공시킨 ‘솔리다르노시치’(연대노조)의 고향이다. 중앙역에서 불과 몇백미터 떨어진 바닷가에 거대한 크레인들이 서있다. 연대노조를 이끈 노동자 출신 대통령 레흐 바웬사가 전기공으로 일했던 그단스크 조선소다. 20여년 전 1만8000명이었던 노동자가 지금은 3000여명으로 줄었다.
체제전환 일궜지만 빈부격차·부패 심화
연대노조, 사회보장 촉구 등 재결집 모색
1980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자유노조가 출범할 당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 어느 노동자 지난 21일 선로보수 작업을 하고 있던 스타니스와프 스테로노프스키(53)는 그단스크 조선소에서만 35년째 일해왔다. 20년 전 연대노조 운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희망이 빈 자리를 곤궁한 삶이 파고들었다. 그의 큰아들도 이 조선소에서 일한다. 작은 아들은 돈 벌러 외국에 나갔다. “한 달에 2000즈워티(약 83만원)를 받는데, 이것으론 생활하기 힘들다. 옛날엔 5000즈워티를 받았는데….”
폴란드는 1989년 정권교체 직후 급진적 경제개혁정책인 ‘충격요법’으로 동구권의 시장경제 이행을 선도했다. 1996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됐다. 그런데 대다수 노동자들의 삶은 갈수록 버겁다. 스테로노프스키는 “옛날엔 월급은 많았지만 살 게 없었고, 지금은 돈이 없는데 물건은 많아졌다”고 말했다. “미래가 불안하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도 했다. 대화를 나눈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자전거를 탄 작업감독자가 다가와 “일하지 않고 뭐하느냐”고 소리쳤다. 늙은 노동자는 힐끔 이마를 훔친 뒤 다시 삽을 집어들고 허리를 굽혔다.
■ 연대노조 연대노조의 고민도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0년 전과 다른 점은,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대신 노동현장에서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는 연대노조가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지금은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있고 국민들의 기대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야체크 리비츠키 연대노조 전국위원회 사무총장은 “자유와 민주적 권리는 이뤘지만 급격한 체제전환의 충격으로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다. 옛 기득권층이 여전히 권력과 돈을 쥐고 있고 빈부격차가 극도로 커진 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현재 폴란드 정규직 노동자들의 월평균임금은 850유로(150만원)다. 그러나 최상위 소득계층의 수입이 최하위계층의 14배에 이를만큼 소득격차가 크다. 리비츠키 위원장은 “2004년 유럽연합(EU) 가입 이후 500만명이 더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나갔다”고 우려했다.
■ 어느 택시 운전사 정치권과 정책당국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도 컸다. 시내에서 만난 중년의 택시 운전사는 “정부와 국민간에 믿음이 중요한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다. 옛날보다 좋아졌다고 하지만 정부의 부패가 너무 심하고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않는다”며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정부가 뭐든지 내다팔아서 국민들의 일자리가 없다.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나서도 일자리를 찾아 따로 사는 경우가 많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6월 국내 한 민간 경제연구소가 OECD 회원국 27개국을 대상으로 산출한 사회갈등 지수 순위는 폴란드가 터키에 이어 2위였다(한국은 4위다). 반면 국민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 다시 연대노조 연대노조는 2주 전에 전국총회를 열었다. 정부가 서민 경제와 사회보장은 외면한 채 시장지상주의로 내닫는 것에 제동을 걸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예지 부제크 유럽의회 의장이 직접 참석했고,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은 보좌관을 보낼만큼 관심을 보였다.
리비츠키 사무총장은 “시장경쟁을 무한정 방임하면 언젠가 폭발한다는 것을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목격하지 않았느냐”며 “총회에선 20여년 전에 염원했던 민주주의 정신을 되살리고 연대노조를 강화하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그단스크/글·사진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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