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 프리고진(왼쪽)이 2011년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자신이 운영하던 식당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총리에게 음식을 내왔을 때의 모습이다. AP 연합뉴스
“푸틴과 가까운 이들이 내년 봄 대선에 출마하지 말라고 설득해 볼 수 있게 됐다.”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이끄는 바그너(와그너) 그룹의 무장 반란은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번 사태가 23년간 이어진 ‘푸틴 체제’를 떠받쳐온 러시아 엘리트들에게 끼친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과 가까운 모스크바 신문 편집자 콘스탄틴 렘추코프는 25일(현지시각)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로 러시아 엘리트들이 받은 놀라움을 “내년 봄에 출마하지 말라고 설득해 볼 수 있게 됐다”는 짧은 한마디로 소개했다. 이번 사태로 러시아 엘리트 집단의 재산과 안전을 지켜온 ‘보증인’이었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지위가 크게 흔들리게 됐다는 것이다.
보리스 옐친(1931~2007) 대통령의 뒤를 이어 2000년 러시아 대통령으로 취임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3차에 이르는 개헌으로 국가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해 왔다. 특히 2020년 3차 개헌에선 2기·12년으로 정해진 대통령 임기가 현직 대통령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현재 임기가 끝나는 2024년부터 새로 2기·12년 뒤인 2036년까지 집권을 보장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푸틴 대통령이 강조한 것은 러시아의 안정이었다. 하지만 이번 반란으로 소련 붕괴 이후 국가적인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가져왔다는 푸틴 대통령의 신화에 큰 흠이 가게 됐다. 프리고진의 도를 넘은 발언이 이어지는데도 갈등을 사전에 조정하지 못했고, 그래서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 실패했으며, 결국 자신이 러시아의 “등 뒤에 칼을 꽂은 반역자”라 부른 이들과 ‘정치적 타협’을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용병 집단인 바그너(와그너)그룹 군사 반란이 끝난 다음날인 25일(현지시각) 모스크바에서 경찰이 탐지견을 동원해 승용차 검문검색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타스 연합뉴스
향후 푸틴 대통령의 운명을 결정할 변수는 세 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첫째, 무장 반란을 일으킨 바그너 부대에 대한 처리이다. 이번 반란에 참여한 대원들은 면죄부를 받는 조건으로 자진 철군에 동의했다. 현지 언론들은 25일 현재 이들이 러시아 남부 도시 밀레로보 군공항에 머물고 있다고 전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24일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바그너 대원들은 여전히 국방부와 계약을 할 자격이 있다”고 말했지만, 참여한 이들에 대해선 언급을 피했다. 바그너 용병들은 이번 전쟁에서 사기도 떨어지고 훈련도 부족한 정규군보다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왔다.
둘째 변수는 프리고진과 갈등을 벌인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참모총장 등 군 지도부 개편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26일 쇼이구 장관이 “특별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지역의 서부 전투집단 내 한 부대의 전방초소를 시찰했다”고 밝혔다. 군 지도부 교체는 없다는 전날 페스코프 대변인의 말대로 일단 건재함을 과시한 모양새다. 하지만, 이미 무능력을 노출한 군 지도부가 무장 반란군이 수도를 향해 진군하는 ‘국난’ 이후에도 계속 통솔력을 발휘할지 분명치 않다. 쇼이구 장관 등을 성토해온 러시아 군사 블로거들은 알렉세이 듀민 국방장관 재기용, 지난해 하반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휘했던 ‘아마겟돈 장군’ 세르게이 수로비킨의 참모총장 기용설 등을 쏟아내고 있다.
이 두 변수는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을 어떻게 끝낼까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이어진다. 프리고진은 이번 반란을 일으키며 푸틴 대통령이 내걸어온 ‘특별군사작전’에 대한 명분을 훼손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의 안전을 위협해 군사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정면 부인하며 이 전쟁이 쇼이구 장관 등 러시아군 내 특권층의 이해 때문에 시작됐다고 주장한 것이다.
반면 미국 등은 지지부진한 우크라이나의 반격 공세에 대한 피로감을 이겨내고 다시 적극적인 군사 지원에 나설 명분을 얻게 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5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전화 회담에서 서방이 계속 무기를 지원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도 “확고한 미국의 지원”을 약속했다.
푸틴 대통령의 전임자였던 옐친은 러시아 엘리트들의 부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무능을 보여 권좌에서 밀려났다. 이후 러시아 권력층들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푸틴 대통령에게 권력을 넘겼다. 미하일 카시야노프 전 러시아 총리(재임 기간 2000~2004)는 영국 <비비시>(BBC)와 한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는 푸틴 대통령의 “종말의 시작”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23년 전 옐친이 맞닥뜨렸던 현실이 이제 푸틴 앞에 어른거리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베를린/노지원 특파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