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국제 유럽

‘정통 좌파 밀리밴드’는 총리가 될 수 있을까

등록 2015-05-03 20:12

[뉴스 쏙] 영국 총선 D-3
‘빨갱이 밀리밴드’는 대의민주주의의 고향 영국에서 사실상 첫 유대인 총리가 될 수 있을까?

7일 치러지는 영국 총선은 집권 보수당과 정권 탈환을 노리는 노동당이 접전을 거듭하며 막판까지 ‘초박빙’의 판세를 이어가고 있다. 5월1일 <비비시> 방송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보수당과 노동당은 각각 34%와 33%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비비시>와 <가디언>이 각각 집계한 양당의 지지율은 지난해 10월부터 단 한번도 31~34% 사이를 벗어난 적이 없다. 3월 중순부터는 1%포인트 안에서 엎치락뒤치락해왔다. 이번 선거는 영국 의회 역사상 가장 치열한 선거로 기록되고 있다.

접전의 선두에는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 형을 딛고 노동당 대표에 오른 에드 밀리밴드(46)와 부유한 엘리트로 마흔넷에 총리가 된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49)이 서 있다.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두 젊은 지도자의 대결은 ‘역대 가장 인기 없는 야당 대표’라는 꼬리표를 달고 선거전을 시작한 밀리밴드가 총리가 될 수 있을지 여부로 수렴된다.

밀리밴드는 1969년 폴란드 유대인의 피를 물려받은 벨기에 태생의 마르크스주의 학자 랠프 밀리밴드 전 런던정경대 교수의 작은아들로 태어났다. 랠프 밀리밴드는 유대인 난민선을 타고 벨기에를 떠나 1940년 영국에 도착했다. 그의 어머니 매리언 역시 폴란드 유대인 출신으로 1947년 영국으로 건너왔다. 매리언의 아버지는 나치의 노동수용소에서 숨졌다. 에드 밀리밴드는 자신의 가족에게 정치는 “생과 사의 문제”라고 말한다.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 대표가 이번 선거에 승리한다면 그는 사실상 영국의 첫 유대인 총리가 된다. 140여년 전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도 유대계였지만 그는 소년 시절 성공회로 개종했다. 유대인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다. 무신론자인 밀리밴드는 2013년 이스라엘 방문과 함께 자신의 혈통과 정체성에 대한 발언을 늘려왔다.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친구”라고 표현하고 “첫 유대계 영국 총리가 되고 싶다”고도 말했다. 영국 언론들이 밀리밴드가 첫 유대인 총리가 될 것이라고 보도하는 이유다.

유대계라는 사실보다 선거에서 더 큰 변수는 에드 밀리밴드 아버지의 ‘사상’이다. 영국 언론은 그의 정치철학 뒤에는 사회주의자 아버지가 존재한다며 그에게 ‘빨갱이 에드’라는 딱지를 붙였다. 실제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에드 밀리밴드는 17살에 노동당원이 됐다. 언론의 적대적인 보도에 대해 그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원했을, 자본주의를 타도할 방법이 아니라, 어떻게 자본주의를 개선할 것인지 논의한다”며 웃어넘겼다.

밀리밴드 가문에서 언론에 이름을 올린 건 랠프와 에드만은 아니다. 에드 밀리밴드의 형 데이비드 역시 유명 정치인이다. 밀리밴드 형제는 나란히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전공하고 각각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의 보좌진으로 정계에 발을 들인다. 동생 에드는 멘토인 브라운의 곁을 지키며 부의 재분배 등 전통적인 좌파 노선을 택했다. 반면, 데이비드는 블레어 당시 총리 밑에서 친기업적 노선을 걸으며 공공서비스 개혁을 시도했다.

에드 밀리밴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브라운 당시 재무장관을 보좌할 때였다. 한 각료는 그를 토머스 크롬웰에 비유했다. “에드 밀리밴드는 거침없었다. 그는 고든의 뒷방에 앉아서 대응법을 ‘지휘’했다. 블레어의 귀에 에드 밀리밴드의 말이 들릴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2007년 6월, 밀리밴드 형제는 영국 총리가 된 고든 브라운의 부름을 받고 나란히 내각으로 들어갔다. 데이비드는 외무장관이 됐고, 동생 에드는 이후 에너지·기후변화장관이 됐다. 2010년 총선을 앞두고 브라운 총리의 지지율이 바닥을 치는 가운데 데이비드는 노동당의 독보적인 새 지도자 후보로 떠올랐다. 동생 에드에게는 노동당 선거정책 초안 작성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는 후보군으로 거론되지도 않았다.

에드는 선거정책을 짜는 내내 노조 간부들과의 회의를 이어갔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노조의 지지를 업고 노동당 대표에 올랐다. 그는 친기업 성향을 보인 블레어 노선과의 결별을 약속했던 것이다. 고든 브라운 총리 시절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에드 밀리밴드의 책략은 최고였다”고 말했다. 당 대표 경선은 형제 사이를 갈라놓았다. 촉망받던 정치인 데이비드는 동생에게 자리를 내주고 정치판을 떠났다. 그리고 뉴욕에 있는 인도주의 기구에 취직했다.

마르크스주의 학자 아들로
노동자 대표지만 인기 ‘바닥’ 헤매
최우선 목표는 ‘불평등 퇴치’
보수언론은 ‘빨갱이’ 딱지를 붙여
위험한 인물로 비꼬고 희화화하고…

보수당 캐머런이 그의 경쟁상대
당 지지율 막판까지 초박빙에
누구도 과반확보 힘든 상황이지만
연립정부 경우의 수는 노동당 유리
과연 밀리밴드가 마지막에 웃을까

형제 관계는 복원됐을까? 에드 밀리밴드는 형이 런던에 올 때마다 만난다고 하지만 형의 친구들은 그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에드 밀리밴드는 이번 선거에서 노동당과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노동당 대표 경선 당시 “한번도 낙선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던 그다. 밀리밴드는 “영국에는 내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이제 힘있는 소수만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 일하도록 영국을 바꿀 때”라며 “이게 나의 목표이고 노동당의 존재 이유”라고 외친다. 그리고 최우선 목표로 ‘불평등 퇴치’를 꼽는다. 연소득 15만파운드(약 2억4000만원) 이상의 고소득자에게 50%의 세율을 부과하는 정책을 다시 도입하고, 200만파운드 이상 주택 소유자에게 ‘맨션세’를 매기겠다고 공언했다. 수년째 축소되어온 영국 의료복지제도 국민건강보험(NHS)의 확대와 최저임금 인상 등을 약속했다. 급진 좌파 정책이라는 비판에도 그는 “더 넓은 어깨를 가진 사람들(부자)이 가장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는 공평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올해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상위 1%를 상대로 추진한 ‘부자 증세’를 종종 언급한다. 친기업 노선을 걸어온 보수당의 캐머런 총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에 영국 기업인 100여명은 ‘밀리밴드의 승리는 영국 경제에 파멸을 불러올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영국 언론은 밀리밴드의 정책 중에 그나마 기업인들의 반감을 완화할 수 있는 건 영국의 유럽연합 잔류 공약 정도라고 짚는다.

보수적인 영국 언론은 ‘사회주의자 아버지’를 둔데다 노동당의 ‘좌향좌’를 이끄는 밀리밴드를 가만두지 않았다. ‘빨갱이 에드’는 위험한 인물로 묘사됐다. 만평들은 밀리밴드를 한층 더 비꼬며 영국의 유명 코미디 캐릭터 ‘미스터 빈’ 혹은 클레이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의 월레스로 그려 희화화했다.

밀리밴드가 넘어야 할 가장 높은 벽이 바로 언론과 여론이 됐다. 지난 1월 영국 리서치기업 유고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밀리밴드가 당 대표로서 일을 잘 수행하느냐는 물음에 잘한다는 응답과 못한다는 응답의 차가 -55로 나타났다.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모리와 오피니엄 등 다른 기관들의 조사에서도 한결같이 캐머런에 견줘 상당히 떨어졌다. 밀리밴드의 호감도가 너무 낮아 노동당에서는 그를 몰아내고 인기 있는 전 내무장관 앨런 존슨을 대표로 세우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밀리밴드는 부인했지만 <파이낸셜 타임스>는 당시 노동당 고위급 인사 두 명이 존슨의 의사를 타진했는데, 존슨의 완강한 거부로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보도했다.

이번 선거 국면에서도 노동당 인사들은 은연중에 밀리밴드와 거리를 두고 있다. 영국 언론은 상당수 노동당 후보들이 밀리밴드의 지원 유세를 꺼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밀리밴드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선거 홍보물에 싣지 않은 후보도 있다. 노동당 누리집에서는 당의 ‘얼굴’인 밀리밴드가 노동당을 지지하는 젊은 부자와 선거 쟁점 정책 항목 뒤에 등장한다. “강한 리더십”이라는 구호와 함께 전면에 캐머런의 사진을 내건 보수당의 누리집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기원이 어떻든 밀리밴드는 보수당뿐 아니라 대다수의 영국 언론 그리고 여론과 맞서 싸우고 있다.

영국 보수당-노동당 총선 주요공약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사연 많은 밀리밴드를 누르고 재집권을 노리는 캐머런 총리는 ‘엘리트’라는 한 단어로 상징할 수 있다. 1966년 부유한 주식 중개인 아버지 이언과 판사 출신 어머니 메리의 아들로 태어난 데이비드 캐머런은 국왕 윌리엄 4세의 후손이다. 영국 최고의 명문 이튼스쿨을 나와 옥스퍼드대학에서 밀리밴드와 마찬가지로 철학과 정치, 경제학을 전공했다. 본격적으로 정계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7년간 <칼턴 텔레비전>의 홍보책임자로 일했다. 2000년 총선에서 처음 당선된 그는 2005년 서른아홉의 나이에 ‘보수당 개혁과 세대교체’를 외치며 화려하게 보수당 대표로 우뚝 섰다. 그리고 2010년 총선 승리를 이끌어 13년 만에 노동당 정부의 막을 내렸다. 1812년 이래 영국이 배출한 최연소 총리로 등극했다. 5년간 총리직을 역임한 지금까지 그의 지지도는 밀리밴드를 한참 앞선다. 여론조사 결과는 영국 국민들이 캐머런을 세련되고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로 인식한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보수당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노동당을 따돌리지 못한 캐머런은 보수당 선거정책의 전면에 ‘노동자들에게 좋은 삶’을 내걸었다. 일종의 ‘물타기’ 전략이다. 캐머런은 공공임대주택에 사는 130만가구에 싼값으로 집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노동자의 표심을 산, 정부 소유 주택의 대규모 할인 공급 정책을 따온 것이다. 캐머런은 또 맞벌이 가구에 제공하는 무상 아이돌보미 서비스를 주당 30시간으로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최저임금 이하를 받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소득세를 면제하겠다는 공약도 내놨다. 그는 보수당이 자유민주당과 연립정부를 세운 2010년부터 “노동자들의 당이 됐다”고 주장한다. 이는 노동당 지지자뿐 아니라 반유럽연합 및 반이민 정책으로 노동자들 사이에 돌풍을 일으켜 3당으로 떠오른 극우 영국독립당을 겨냥한 것이라고 영국 언론은 분석했다.

밀리밴드의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영국 언론은 밀리밴드가 총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다른 당과 연립정부를 꾸릴 수 있는 경우의 수 등이 노동당 쪽에 유리하다는 분석이다. 보수당과 노동당에 이어 50석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스코틀랜드독립당의 경우 보수당의 재집권을 막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반면 여러차례에 걸쳐 노동당과 거래할 뜻을 내비쳤다. 그렇다고 노동당과 스코틀랜드독립당의 밀월 관계가 성립된 것은 아니다. 두 당의 연정이 성립되면 노동당은 스코틀랜드독립당에 끌려다닐 것이라는 보수당의 공세와 세간의 우려가 높아지자 밀리밴드가 스코틀랜드독립당과의 ‘거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국 언론들은 연정보다 낮은 단계의 연대는 가능할 것으로 봐 밀리밴드의 우세를 점치고 있다. 둘의 연대가 성립된다면 보수당과 손잡을 수 있는 극우 영국독립당(1석)과 자유민주당(26~27석)의 의석수를 합한 것보다 한참 앞선다. 영국 정부 구성은 7일 투표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때부터 복잡한 셈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김지은 기자 mira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국제 많이 보는 기사

‘한강 열풍’ 20여년 전부터…스웨덴에 한국문학 알린 작은 출판사 1.

‘한강 열풍’ 20여년 전부터…스웨덴에 한국문학 알린 작은 출판사

NYT·가디언 ‘윤석열 탓 쌓이던 국민 분노, 계엄으로 폭발’ 보도 2.

NYT·가디언 ‘윤석열 탓 쌓이던 국민 분노, 계엄으로 폭발’ 보도

일본 찾는 한국인 700만명 시대, ‘스이카 카드’ 있으면 ‘슝슝슝~’ 3.

일본 찾는 한국인 700만명 시대, ‘스이카 카드’ 있으면 ‘슝슝슝~’

영국 가입으로 확장된 CPTPP…‘트럼프 시대’에 자유무역 통할까? 4.

영국 가입으로 확장된 CPTPP…‘트럼프 시대’에 자유무역 통할까?

외신 “K팝 콘서트장 같은 탄핵집회…민주주의 위해 온 세대 함께해” 5.

외신 “K팝 콘서트장 같은 탄핵집회…민주주의 위해 온 세대 함께해”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