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부 '창의적 외교' 문제해결 단서 제공
미궁에 빠진 한국인 인질사태 해결을 위해 미국은 특단의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는 걸까.
그간 답답할 정도로 "인질은 즉각 석방돼야 하며, 테러리스트에는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는 원칙만 되풀이해온 미국 정부 내부에 변화의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이번에 방미한 국회 원내대표단과 외통위원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된 '창의적 외교'(creative diplomacy)가 대표적인 사례다.
일각에선 이번 인질사태와 관련해 20여년 전부터 확립해온 대테러 원칙에 따라 이미 단계별 시나리오를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 징후도 확실하게 감지되며 '창의적 외교'도 그 시나리오의 일환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 베일에 가려진 '창의적 외교' = 이 개념은 2일 국무부 청사에서 국회 5당 원내대표들을 만난 존 데일리 테러비확산담당 차관보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다. 니컬러스 번스 국무차관이 이 개념을 적극 뒷받침했다.
그렇다면 '창의적 외교'란 뭘 의미하는 걸까. 번스 차관은 물론 그 누구도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길이 없다.
다만 '테러리스트에 양보없다'는 미국의 대테러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의 체면을 살리는 방법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일각에서는 이번 인질극을 주도하는 탈레반 무장세력의 수감자 석방요구에 대해 사면 조치후 석방하는 방안이 조심스럽게 거론된다.
무니르 만갈 아프간 내무차관이 "단 1명이라도 아프간의 법에 어긋나는 수감자와 인질 교환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점을 감안, 아프간 법체제를 훼손하지 않는 '사면후 석방방안'이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해 1월 이라크에서 미국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여기자 질 캐롤의 사례를 원용하자는 주장인 셈이다.
당시 미국은 '테러단체와의 비협상 원칙'을 깨고 수용소에 억류중이던 이라크 여성포로 5명에 대해 사면조치가 있은 뒤 캐롤과 맞교환했다.
물론 당시에도 미국 정부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모니터측이 몸값을 지불하고 캐롤을 석방시키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묵시적 동의를 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 '지방 부족장-원로들 협상창구' 활용 관심 = 그러나 군사 및 외교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가 이번에도 '수감자 사면조치 후 석방'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3월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의 마스트로자코모 특파원이 탈레반에 납치돼 2주만에 석방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강력히 어필한 것이 그 근거다.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측의 수감자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 했으나 이탈리아 군의 철수를 우려, "단 한번만 예외를 인정한다"며 탈레반 재소자 5명을 풀어줬다. 그러나 미국은 이 사건 처리가 외국인 납치를 부채질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일이 있었던 터라 미국은 절대 사면조치 등 편법을 통해 탈레반에 굴복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번스 차관이 국회대표단과의 면담에서 "한국과 아프간, 미국, 유엔이 공동의 입장을 갖고 탈레반의 심리전에 이용당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인내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미국은 '테러리스트에게 양보나 협상은 없다'는 대 테러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당분간 외교적 해법에 주력하겠다는 의미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물론 협상은 한국정부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다만 앞으로 아프간 정부측 협상대표단의 중재에 의존해온 전략에서 탈피, 탈레반에 큰 영향력이 있는 지방 부족장과 원로들을 상대로 한 협상에 좀 더 역점을 두는 방식으로 변화를 꾀하려는 기류가 미 정부내에서 강하게 감지된다.
한 전문가는 "미국이 앞으로 5,6일 정상회담 등을 통해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을 '압박'할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고 분석했다. 아닌게 아니라 아프간과 파기스탄 합동 부족장회의가 조만간 열릴 예정이어서 이런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탈레반과의 직접대면을 지켜보면서 인질석방을 위한 '약간의 편법'은 묵인하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이 '창의적 외교'가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할 지가 관심사다. 탈레반의 예상치 못한 행동과 인질들의 신변 안전에 이상 발생 등 변수가 너무 많아 그 효율성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조복래 특파원 cbr@yna.co.kr (워싱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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