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목표 지적에도 전세계로 분노 확산
직접 민주주의 구현하며 ‘점진적 변혁’ 꿈꿔
“시애틀 시위는 일시적…지금은 외연 확장중”
직접 민주주의 구현하며 ‘점진적 변혁’ 꿈꿔
“시애틀 시위는 일시적…지금은 외연 확장중”
스페인의 텐트 시위 등에 영향을 받아 지난달부터 미국 뉴욕 리버티 플라자 공원(주코티 공원)에서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불과 한달여 만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올해 초 아랍 국가에서 일어난 민주화 혁명인 ‘아랍의 봄’에 비유해 ‘미국의 가을’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월가 점령’ 시위는 이제 미국의 국경을 벗어난 전세계적 이슈로 확장되고 있다.
‘월가 시위’는 ‘아랍의 봄’은 물론 과거 어느 시위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여러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하나의 주제를 놓고 시민들의 시위가 유행병처럼 전세계에 급속도로 확장되는 양상은 역사상 이번이 거의 처음이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그만큼 세계가 좁아진 탓이기도 하지만 ‘1% 대 99%’라는 빈부격차 심화에 대한 공감과 분노가 전세계적 현상임을 반영한다.
‘월가 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도자 없는, 직접민주주의에 의한 의사결정 구조다. 이는 ‘인터넷 광장’ 문화가 빚어낸 결과로 보인다. 리버티 플라자 시위대의 실무그룹 일원인 블랙 페더(19·대학생)는 “시위대 안에 리더십과 계급 서열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힘”이라며 “이것이 의사결정을 느리게 하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누구나 참가할 수 있게 한다. 전세계로 급속도로 확산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금융자본주의와 빈부격차 확대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월가 시위’의 외형은 평화적 운동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개발도상국에서 주로 일어나는 민주화 혁명과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월가 시위’는 최대한 합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시위를 할 때는 수천명이 행진을 해도 경찰 저지선(폴리스라인) 안쪽 인도를 벗어나지 않고, 리버티 플라자의 위생 악화를 이유로 강제퇴거를 요구하자 스스로 대청소를 하며 타협을 시도했다. 또 “부자들을 잡아먹자”, “은행을 강탈하라” 등 일부 구호는 매우 과격하지만 말만 그럴 뿐, 이들의 저항은 피자 종이상자에 슬로건을 적어 흔들고, “부자 증세”, “월가 규제” 등 주장을 외치고, 행진하는 게 전부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던 ‘아랍의 봄’에 비해 비장함이나 절박함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한다. 하지만 15일 시위에 참가한 마디하 타히르(31·컬럼비아대 박사과정)는 “평화시위가 외연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시위에 참가하는 어른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평화시위가 가진 힘”이라고 평가했다.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셀도 최근 미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평화시위의 힘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다.
미국의 많은 정치·사회학자들은 ‘월가 시위’에 대해 “언젠가 소멸하겠지만, 미국 정치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고 있다. 시위대는 ‘혁명’이라는 구호를 자주 언급하고 있지만, 이때 말하는 ‘혁명’이란 ‘급진적인 체제전복’ 성격을 지닌 일반적 의미보다, 오히려 ‘점진적 변혁’ 쪽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다.
반세계화 활동가인 나오미 클라인은 이번 시위를 1999년 시애틀에서 촉발된 반세계화 시위와 비교하며 “당시는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화기금(IMF), 주요 8개국(G8) 등이 주최한 정상회의를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일시적이었다”며 “또 경제가 호경기였던 당시보다 극심한 경기침체에 빠져 있는 지금이 변혁을 위해선 더 좋은 시기”라고 말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는 최근 칼럼을 통해 ‘월가 시위’에 대해 “1968년 봉기 이후 미국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라며 “시위는 이미 성공했고 앞으로 오랫동안 그 유산을 남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지금은 신자유주의에서 포스트신자유주의 과정으로 넘어가는 중인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불확실한 포스트체제 속에서 정치적 주체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니까 시민들의 자발적 대응이 나오는 것”이라며 “자발성에 기초한 이런 형태의 운동은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욕/권태호 특파원, 유선희 기자 ho@hani.co.kr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지금은 신자유주의에서 포스트신자유주의 과정으로 넘어가는 중인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불확실한 포스트체제 속에서 정치적 주체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니까 시민들의 자발적 대응이 나오는 것”이라며 “자발성에 기초한 이런 형태의 운동은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욕/권태호 특파원, 유선희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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