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왼쪽)이 7일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산티아고 페냐 파라과이 대통령(오른쪽)을 만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1973~1990) 당시 제정된 헌법을 대체할 칠레의 두번째 헌법 개정안이 나왔다. 보수 인사들이 주도한 이번 개정안은 임신중지권 제한 조항이 들어 있는 등 보수적 색채가 짙어졌다.
에이피(AP) 통신은 7일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헌법위원회로부터 피노체트 정권 시절 만들어진 헌법을 대체할 두번째 개헌안을 전달받았다고 전했다. 보리치 대통령은 “결정적인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제 중요한 건 국민의 목소리며 국민의 결정”이라며 이 개헌안을 다음달 17일 국민투표에 부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번 개헌안은 지난해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첫 개정안과 달리 극우파를 포함한 보수 인사들이 주도해 만들어져 보수 색채가 짙어졌다. 가장 논란이 되는 대목은 “법률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구절이다. 이 조항은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전면 부인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칠레에선 성폭행을 당하거나, 태아가 살아남을 수 없거나, 산모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임신중단이 허용된다.
또 다른 논란거리는 불치병에 걸린 재소자가 사회에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가택연금을 허용하는 조항이다. 이에 대해 피노체트 독재 시절 살해·납치·고문 등 인도에 반한 범죄를 저질러 투옥된 이들을 위한 조처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파업권을 제한하는 대목과 하원의원 정원을 줄이도록 한 규정 등도 논란거리다.
이번 개헌안은 칠레가 2020년 10월 국민투표를 통해 피노체트 독재 시절 제정된 현행 헌법을 개정하기로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듬해 5월 국민투표를 통해 진보 성향의 인사들이 대거 포함된 제헌의회가 구성됐다. 이들은 국민의 사회권 신장, 원주민의 권리 보호, 양성평등 의무화 등 진보적 의제가 담긴 헌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지난해 9월 국민투표에서 61.9%의 반대로 부결됐다.
이후 지난 5월 정당 추천과 국민투표로 새로 구성된 헌법위원회가 새 개헌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새 헌법위원회엔 극우파를 포함한 보수 인사들이 대거 포진해 첫번째 부결된 개정안에 포함됐던 원주민의 자결권 등 진보적 의제가 거의 대부분 빠지고 보수적 의제가 다수 채택됐다. 진보 성향의 보리치 대통령은 “헌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의에서 중립적인 입장에 설 것”이라며 “개정안이 국민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면 정부는 헌법이 실행되도록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개헌안도 국민투표를 통과할지 속단하긴 이르다. 지난달 25∼26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1%가 새 개헌안에 반대(찬성 34%)한다고 답했다. 새 개헌안이 또 부결되면, 피노체트 시절 만들어진 현행 헌법이 계속 칠레의 헌법으로 남게 된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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