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시위대가 14일(현지시각) 트럭을 동원해 주요 고속도로를 막아 세우고 있다. AP 연합뉴스
페루의 새 정부가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탄핵에 항의하는 격렬한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결국 한달 간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향후 시위대의 반응이 주목된다.
루이스 알베르토 오타롤라 국방장관은 14일(현지시각) 계속된 폭력 시위, 약탈, 도로 점거로 정부가 “강압적이고 권위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됐다”며 30일 동안 전국에서 “개인의 안전과 자유”가 정지될 것이라고 밝혔다고 <에이피> 통신이 15일 보도했다. 이날 국가비상사태 선포에 따라 앞으로 한 달간 집회가 금지되고 이동의 자유도 제한된다. 또 경찰은 영장 없이 아무 집이나 수색할 수 있고, 군은 경찰 업무를 지원하게 된다. 오타롤라 장관은 야간 통행금지 실시에 대해선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국방부는 이번 비상사태 선포에 대해 국무회의의 동의를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탄핵 뒤 취임한 신임 디나 불루아르테 대통령에 대해선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페루에선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7일 탄핵된 뒤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며칠째 수도 리마를 비롯한 전국에서 이어지고 있다.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최소 6명이 숨지는 등 큰 혼란이 이어지는 중이다. 이들은 곳곳에서 주요 간선도로를 점거하고 경찰서·관공서 등을 습격했고, 심지어 페루 관광지의 관문인 아레키파 국제공항의 활주로에 진입해 항공기 이착륙을 방해했다. 이 때문에 유명한 잉카유적지 마추피추를 찾은 많은 관광객이 발이 한동안 묶였다. 이번 비상사태 선포는 비상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이런 상황을 되돌려 안정을 되찾기 어렵겠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대선 때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역할을 수행해온 볼루아르테 신임 대통령은 취임 뒤 “페루가 더는 피로 물들 수 없다”며 시위 자제를 촉구해왔다. 그는 과거 ‘빛나는 길’ 등의 반군 활동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됐던 역사를 거론하며 “우리는 1980년대~90년대 어려운 시기를 겪어냈다. 다시 고통스러운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내가 형제 자매 여러분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조용히 기다려 달라’는 것 뿐”이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탄핵 반대 시위대는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석방, 볼루아르테 대통령의 사임, 의회 해산, 대선과 총선의 즉각 실시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이어왔다. 이와 관련해 전날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1년 뒤인 내년 말 새 대통령과 의원을 뽑는 선거를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2026년 7월까지인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모두 채우지 않고 2024년 4월 새 대통령을 뽑는 대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혔으나 대선 일정을 앞당기겠다며 다시 한발 물러선 것이다.
한편, 카스티요 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잔학 행위와 굴욕, 학대가 계속되고 있다. 이제 그만하라”며 ‘아메리카인권위원회’(IACHR)에 이번 사태에 개입해줄 것을 진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아메리카인권위는 미국·캐나다·브라질 등 아메리카 대륙 35개 나라가 참여한 ‘미주기구’(OAS·아메리카국가기구)의 기관으로, 회원국의 인권 관련 사안을 조사할 수 있다.
그는 의회 탄핵 직후 타고 가던 승용차에서 체포됐다. 검찰은 그가 멕시코 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려 했다고 밝혔다. 법원은 검찰의 요청에 따라 7일 간의 구금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검찰은 석방이 예정됐던 14일을 하루 앞두고 돌연 법원에 정식 재판을 위해 구금기간을 18달로 늘려 달라고 요청했다. 법원은 15일 청문회를 열어 서로의 입장을 직접 들은 뒤 판단하겠다며 임시로 구속 기간을 48시간 연장해 놓은 상태이다.
페루는 이번 사태를 포함해 최근 6년 동안 6명의 대통령이 취임하는 등 극심한 정치 불안에 시달려왔다. 빈농 교사 출신인 좌파 정치인인 카스티요 전 대통령도 지난해 7월 취임해 겨우 17달 만에 물러나는 초단기 대통령이 됐다. 그는 짧은 재임기간 의회를 장악한 야당과의 권력다툼 끝에 이미 두 차례나 탄핵 위기를 넘긴 바 있으며, 그와 그의 가족은 6차례나 부패 혐의로 조사 대상이 됐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