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대응 활동가들이 30일 미국 연방대법원 앞에서 판결에 항의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퇴행적 판결을 쏟아내고 있는 미국 연방대법원이 이번에는 온실가스 정책을 크게 무력화시키는 판결을 내놨다. 임신중지권과 총기 휴대 관련 판결에 이은 것으로, 인권과 환경을 강조하는 미국 진보 진영이나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법원의 ‘도전’에 큰 낭패에 빠지고 있다.
미국 대법원은 30일(현지시각) 온실가스 방출을 제한하는 포괄적 정책은 부당하다며 석탄 주산지인 웨스트버지니아 등 공화당이 집권한 19개 주가 환경보호국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6 대 3 의견으로 원고들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은 환경보호국이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를 통해 석탄발전소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제한하고, 위반시 벌칙을 부과하는 것은 청정공기법이 이 기관에 부여한 권한 범위 안에 있는지가 쟁점이었다. 다수의견을 집필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석탄 발전 시대를 끝내기 위한 이산화탄소 배출 제한은 “오늘날의 위기에 대한 합리적 해법이 될 수도 있다”면서도 “이 정도로 중요한 일은 의회가 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환경보호국이 의회가 법률로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정책을 펴는 것은 위법하다는 것이다.
이 판결로 미국의 온실가스 저감 노력은 큰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소송에 가담한 19개 주가 방출한 온실가스는 2018년 기준으로 미국 전체의 44%를 차지했다. 이 주들은 2000년 이후 온실가스를 평균 7% 감축했을 뿐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판결에 대해 “나라를 퇴보시키는 또 하나의 결정”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기후 위기가 공중 보건에 가하는 위험과 실존적 위협을 무시할 수 없다”며 대응책을 강구하겠다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첫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탈퇴한 파리기후변화협약에 재가입하고, 2030년까지 미국의 온실가스 방출량을 2005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하는 등 적극적인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내세워왔다. 다른 진보 성향 대법관 2명과 함께 소수의견을 낸 엘리나 케이건 대법관은 다수의견에 대해 “대법원이 의회나 전담 기관 대신 스스로 기후 정책 결정권자가 됐다”고 비판했다.
대법원이 바이든 행정부 정책 기조나 기존의 인권 친화적 판례를 무력화시키는 ‘메가톤급’ 판결을 한 것은 일주일여 만에 세 건에 이르게 됐다. 지난 23일에는 대형 총격 사건이 잇따르는데도 뉴욕주의 권총 휴대 허가제를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이튿날에는 1973년 이래 임신중지권을 보장해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깼다.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 진보 진영은 진보적 판례와 정책을 무력화하려고 작심한 듯한 6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들의 행보에 비판과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를 마치면서 한 기자회견에서 임신중지권 보장을 위한 입법은 상원에서 필리버스터 적용을 제외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민주·공화당이 각각 50석씩 점유한 상원에서는 필리버스터를 생략하려면 60명이 동의해야 해, 상대 당 의원을 10명 이상 설득하지 못하면 법안 처리가 불가능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이어 이날까지 이어진 나토 정상회의에서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유럽과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잇따른 퇴행적 판결로 미국의 ‘도덕적 지도력’에도 손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두 정상회의 개막 전 나온 임신중지권 부정 판결에 대해 영국·프랑스·캐나다 등 동맹국 정상들이 “끔찍하다”는 등의 반응을 내놨다. 온실가스 정책에 대한 이번 판결로 2위 온실가스 배출국으로서 기후변화 대응을 주도할 명분과 동력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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