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7일 모스크바의 국가우주국 청사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가 떠나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7일(현지시각) 핵무기 운용 부대에 ‘특수 경계 태세’ 돌입을 지시하면서 유럽이 30여년 전 냉전 종식 후 처음으로 핵 공포에 휩싸였다. 푸틴 대통령의 진의가 무엇이고, 협박의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에 미국과 유럽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 등은 즉각 푸틴 대통령의 발언을 반박하며 경고에 나섰다. 미국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오판한다면 상황은 훨씬 위험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도 <시엔엔>(CNN) 인터뷰에서 “위험한 표현이며, 이런 행위는 무책임하다”고 성토했다. 핵보유국으로 인정된 국가가 공공연히 핵무기 사용을 위협한 사례는 1962년 미국과 소련 간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로는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6천여기의 핵탄두를 보유한 러시아군은 약 1600기를 실전배치한 상태로 알려졌다. 푸틴 대통령의 지시로 러시아군 구체적으로 수뇌부가 어떤 조처를 취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분산 배치하고 폭격기에 핵폭탄을 적재하는 조처가 뒤따를 수 있다.
미국과 나토 쪽은 푸틴 대통령의 발언을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 금융 결제망 스위프트(SWIFT)에서 차단하는 등 고강도 제재를 가한 것에 대한 거친 반발이자 엄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나토 쪽의 “불법 제재”와 “공격적 성명들” 때문에 러시아군에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와 28일 첫 협상을 앞두고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도 묻어난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선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높지는 않아도 현 상황을 심각히 봐야 한다는 반응도 나온다. 한스 크리스텐센 미국과학자연맹 핵정보프로젝트 소장은 인터넷 매체 <복스>에 “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인) 일주일 전보다는 더 걱정하는 입장이 됐다”고 말했다. 우선 엄청난 국제적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을 선택한 러시아가 전황이 불리해지면 ‘유혹’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재래식 전력의 큰 우위를 바탕으로 우크라이나 국경을 쉽게 돌파한 러시아군은 이후 키예프 등 대도시 장악에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다.
강력한 제재가 러시아에 실제적으로 파괴적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 극단적 반격에 나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미국 조지타운대의 핵정책 전문가 케이틀린 탤머지는 “군사적으로 계속 차질에 부딪히고 외교적, 정치적 상황이 파탄에 이른다면 푸틴이 핵무기에 눈을 돌릴 가능성은 실제로 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에 말했다.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 ‘문턱’이 낮아진 점도 봐야 한다. 전에는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을 때” 사용 가능하다던 규범이 2020년에는 “군사행동 확대를 예방하거나 그것을 종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푸틴 대통령이 거듭 대결적 태도를 보이며 핵 무기 사용을 연상하게 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지난 19일 여러 곳에서 진행한 핵미사일 훈련을 영상으로 참관했다. 24일 우크라이나 침공 개시를 발표하면서는 “누구든 우리의 길에 개입해 우리 나라와 우리 사람들을 위협하면 러시아는 즉각 대응할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며, 그 결과는 당신들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본 적 없는 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같은 연설에서 “오늘날 러시아는 가장 강력한 핵무장 국가들 중 하나”라고도 했다.
전쟁 개시 직전까지 ‘실제 침공할지는 푸틴만 안다’고 했는데 이제 ‘핵무기를 실제 사용할지도 푸틴만 아는’ 상황이다. 그가 최악의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술 핵무기’ 사용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한 편이다. 우크라이나는 나토 동맹국이 아니어서 핵우산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28일 뉴욕 유엔본부에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논의하는 유엔 긴급특별총회가 소집된다. 긴급특별총회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통과되면 러시아의 고립은 더 깊어질 전망이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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