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상의 회장·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김병준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지난 6월22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한 호텔에서 열린 동행 경제인 만찬 간담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격려사에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 등 4대 그룹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탈퇴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복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경련이 여권 정치인을 회장으로 영입한 지 6개월 만에 재가입을 적극 검토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모양새다. 보수 정부와 재벌 대기업이 또다시 ‘정경유착 카르텔’을 재구축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과 우려가 나온다.
9일 전경련과 재계에 따르면, 삼성·에스케이(SK)·현대차·엘지(LG) 등 4대 그룹은 전경련 재가입 안건에 대해 이사회 및 내부 논의를 진행 중이다. 전경련은 지난달 19일 4대 그룹에 전경련 재가입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 오는 22일 임시총회 전까지 답변을 달라고 공식 요청한 터다. 전경련은 산하 연구조직(한국경제연구원)을 흡수통합해 이름을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바꿔 새로 출범하겠다는 계획과 함께 4대 그룹의 재가입에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 삼성 준감위 거수기될까…태도 바꾼 최태원 SK 회장
전경련의 재가입 요청에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건 삼성그룹이다. 삼성전자 등 5개 계열사는 전경련의 공문 발송 직후 이사회에서 관련 안건을 논의한 뒤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의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삼성 쪽은 “준감위 판단을 통해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준감위 임시회의는 22일로 예정된 전경련 총회 전에 열릴 계획이다. 이찬희 준감위원장(전 대한변호사협회장)도 “아직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전경련 재가입 관련) 임시회의를 앞당겨 열 계획”이라고 했다.
준감위 권고는 의무 이행 사항은 아니지만, 각 계열사가 준감위 권고에 반하는 경영활동을 할 경우 이사회를 거쳐 이를 공표할 의무를 진다. 사실상 준감위가 삼성의 전경련 재가입 열쇠를 쥐게 된 셈이다.
삼성의 이런 발 빠른 대응은 다소 이례적이다. 여론의 부담이 큰 사안인데다 나머지 그룹들도 삼성의 결정 방향에 맞춰 움직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청한 재계 고위 임원은 “삼성이 전경련에 재가입할 의지가 없다면 준감위 판단을 묻지 않고 부정적 입장을 밝혔을 것”이라며 “준감위 역시 재가입 쪽으로 기울지 않겠냐”고 말했다. 삼성이 재가입 정당성을 얻기 위해 준감위 판단 절차를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다만, 이찬희 준감위원장은 최근 전경련 재가입에 대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삼성을 뺀 다른 그룹들은 “결정된 게 없다”는 입장이지만, 전경련 복귀 필요성에 대해서는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4대 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글로벌 보호무역과 미-중 경쟁 등의 환경에서 정부와 기업 간 협력이 매우 중요한 시기다. 통상 이슈에서 기업들 이익을 대변하는 싱크탱크형 경제단체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태원 에스케이그룹 회장은 지난해 3월 기자회견 때 “지금은 재가입 여건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라며 “가입할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달 제주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는 같은 질문에 “전경련이 잘되길 바란다.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며 180도 태도를 바꾼 바 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전경련이 쇄신 모습을 보이겠다며 만든 대국민 토크쇼 연사로 적극 참여하고 있다. 전경련 재가입은 “명분도 실익도 없다”며 일축했던 과거와는 크게 달라진 기류다.
이 때문에 재계 안에서는 이번 총회가 아니더라도 4대 그룹의 전경련 복귀는 시간문제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전경련 관계자는 “우리가 재가입 일정을 못박은 건 아니다. 다만, 총회를 기점으로 단체 이름도 회장도 바뀌니 그때 4대 그룹이 같이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중에 재가입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전경련 재가입 절차를 둘러싼 논란도 예상된다. 삼성과 달리 다른 그룹들은 전경련 재가입 문제를 이사회에서 다룰지 여부에 대해서도 확실한 방침을 밝히지 않고 있다. 통상적으로 일정액 이상의 기부·후원 등을 제공할 경우 이사회 논의가 필요한데, 공식적으로 이사회 의결을 거칠 경우 사외이사의 반대 등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4대 그룹 관계자는 “이사회를 거치지 않더라도 공식적인 의사 표현은 해야 되지 않겠나. 이번에 당장 가입 여부를 결정하지 않더라도 4대 그룹이 공동 행동을 하는 쪽으로 논의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김병준 영입은 대통령실이 4대 그룹에 던지는 메시지”
4대 그룹의 기류 변화는 올해 2월 김병준 회장 직무대행을 영입한 이후 본격화됐다. 김 회장은 윤석열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김 회장 취임 이후 전경련은 대통령의 일본과 미국 순방 때 경제사절단 구성을 주도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줄곧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가 맡아온 재계 창구 노릇을 전경련에 다시 맡긴 것이다. 재계에서 “전경련 부활이 대통령실 뜻이냐”는 말들이 나온 시점도 이때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김병준씨의 전경련 회장 취임 자체가 대통령실의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정부가 곧 기업”이라며 친기업 정책을 표방했다. 재계 역시 이와 비슷한 논리를 펴고 있다. 정부와 기업은 원팀이고, 유기적으로 협조하기 위해 전경련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우찬 경제개혁연대 소장(고려대 교수)은 “세계 경제의 변화로 정부와 긴밀한 협력이 필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책임과 역할은 재벌 이익단체가 아닌 대한상의나 경총(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기능별, 분야별 경제단체들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몫”이라고 말했다. 전성인 교수는 “국정 능력이 취약한 정부가 재벌식 국가 전략으로 도움을 받고, 그 대가로 재벌들은 이권을 챙기고 승계 문제 등을 해결하는 게 지금까지 반복되어온 정경유착의 원형”이라며 “윤석열 정부와 재벌들이 부당한 이해관계를 주고받는 플랫폼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날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인 강훈식·김종민·김한규·오기형·이용우·황운하 의원은 성명을 내어 “(전경련이) 싱크탱크형 경제단체를 지향한다면 4대 그룹 재가입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이재용 회장 등은 ‘앞으로 전경련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국회 청문회에서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력과의 유착 기미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전경련은 지난 3월 일본 재계단체인 경단련과 ‘한-일 미래파트너십 기금’ 창설을 주도했다. 현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법의 일환으로 내놓은 대책에 적극 화답한 것이다. 전경련이 외교안보 갈등에 기업을 끌어들인 모양새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는 “4대 그룹의 전경련 재가입은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노골적인 친재벌 정책의 화룡점정이 될 것”이라며 “정경유착의 통로로 전경련을 부활시켜 국정농단을 다시 하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국정농단을 처벌한 윤석열 대통령의 자기부정”이라고 덧붙였다.
김회승 선임기자, 옥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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