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2008년 4월22일 오전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지하1층 국제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경영 퇴진 선언과 경영 쇄신안을 담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들이 28일 공개한 1조원 상당의 사재 출연은 13년 전 이 회장이 비자금 사건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며 한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거액 기부라는 ‘통 큰’ 결정 밑바탕엔 대형 범죄와 지연된 약속 이행이라는 어두운 그늘도 드리우고 있다는 뜻이다.
이 회장은 ‘삼성 비자금 사태’가 불거지자 2008년 4월 ‘대국민 사과문’에서 경영 일선 퇴진을 선언하고 그룹 경영쇄신 내용의 하나로 “실명 전환한 차명 재산 중에서 누락된 세금 등을 납부하고 남은 것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는 계획을 제시한 바 있다. 이 회장이 차명계좌를 통한 조세 포탈 등 혐의로 조준웅 특별검사팀에 기소된 상황에서 나온 공개약속이다. 당시 특검이 밝혀낸 이 회장의 차명재산은 주식 등을 포함해 4조5천억원가량에 이르렀다. 당시 발표문 중 ‘유익한 일’이란 표현 뒤에 “남은 돈을 가족을 위해 쓰지는 않겠다”는 내용이 딸려 있어 사재의 사회 환원 약속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약속은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고 지금껏 미결 숙제로 남아 있었다. 약속 이행이 지연된 배경에는 2014년 고인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데다,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과 불법 합병 사건 등에 휘말린 사정도 있다. 당시 재판에 넘겨진 이건희 회장은 이듬해인 2009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가 형 확정 뒤 4개월 만에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 등을 명분으로 특별사면됐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은 그 뒤 ‘유익한 일’로 현금 또는 주식 기부, 재단 설립 등 여러 방안을 검토만 했을 뿐, 실행은 끝내 미뤄졌다. 이는 고인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유족들이 상속세 관련 발표를 할 것으로 알려진 시점에 사재 출연 방안을 함께 제시할 것이란 관측이 일찌감치 나왔던 실마리였다.
문제가 된 관련 재산의 규모나 실상은 명확히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지금까지 삼성 계열사 주식 2조1천억원 어치 중 세금 등을 내고 남은 금액이 1조원 정도라고만 알려져 있다. 이 금액의 정확한 규모를 둘러싼 또 다른 논란이 있긴 하나, 유족들의 이날 발표로 ‘유익한 일’에 쓰겠다던 13년 약속은 국내 의료 사업을 위해 1조원을 기부하는 방식으로 일부나마 현실이 됐다. 1조원은 감염병 전담 병원 건립과 관련 연구에 7천억원,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 환자 지원에 3천억원으로 나뉘어 지원되는 것으로 짜여 있다. 기부 방식은 재계 일각의 관측과 달리 별도 재단을 설립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이 또한 눈길을 끄는 점 중 하나다.
유족들은 이날 발표문에서 “상속세 납부와 사회환원 약속은 갑자기 결정한 게 아니라 그동안 이어져 온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며 “생전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상생 노력’을 강조한 고 이건희 회장의 뜻에 따라 다양한 사회환원 사업을 이어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비자금 사건에 뿌리를 둔 사회환원 약속의 뒤늦은 이행이라는 사안의 성격과는 사뭇 다른 시각인 셈이다.
김영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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