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이 되기 3년 전 처음 팀장을 맡아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정말 힘들었어요. 이젠 노하우가 좀 생겼네요.”
김수연 엘지(LG)전자 수석전문위원(상무)은 2년 전 회사의 유일한 80년대생이자 최연소 임원이 됐다. 지금은 에이치앤에이(H&A·생활가전)디자인연구소의 빌트인·쿠킹 태스크 리더로 일하며, 엘지 시그니처와 오브제 컬렉션 등 프리미엄 인테리어 가전 디자인을 책임진다. 김 상무가 이끄는 구성원은 20명 정도. “우리의 일이 정말 중요하다는 책임의식을 구성원들이 공유하도록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한다”는 김 상무와 구성원의 손을 거친 엘지전자 생활가전 부문은 지난해 역대 최고 실적을 냈다.
네이버의 신중휘 파파고 책임리더. “회사의 방향과 개인이 추구하는 방향이 같아야 한다”는 걸 자신의 철학이라 강조한다. 1982년생인 그는 석사학위를 마치고 2011년 병역특례 전문연구요원으로 네이버에 첫발을 들였다. 이후 파파고 개발을 주도하며 2019년 네이버의 최연소 임원으로 승진했다. 그는 “업무와 개인의 관심사를 연결해주고 우선순위를 잡아주면서 개인이 인정받고 성장하게 해주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로 임원으로서의 역할을 소개했다.
국내 주요 대기업에 ‘80년대생 임원’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다. 과거 극소수 총수 일가 자녀들만의 세계였던 ‘30대 임원’의 무대에 올라서는 80년대생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중이다. 최근 1~2년 새 이런 흐름이 부쩍 강해졌다. 씨제이(CJ)그룹은 지난해 연말 단행된 정기임원 인사에서 첫 임원 승진자 38명 가운데 80년대생 5명을 전격 발탁했다. 변화가 더디다는 평가를 받던 케이티(KT)도 지난달 인공지능(AI) 분야 80년대생 인재를 임원급인 연구소장 자리에 영입해 화제를 모았다.
<한겨레>는 국내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지난해 9월말 기준)의 80년대생 임원 현황을 전수조사했다. 한국시엑스오(CXO)연구소가 기업들의 지난해 3분기 사업보고서를 통해 파악한 100대 기업의 80년대생 임원 명단을 1차 자료 삼아, 지난해 연말과 올해 초 사이에 단행된 2021년도 최신 정기임원 인사 변동 내용을 모두 반영했다. 조사 결과, 올해 2월1일 현재 이들 기업에 근무하는 80년대생 임원은 모두 56명(90년생 2명 포함)으로 집계됐다. 복수 기업에 임원으로 중복 선임된 3명을 포함한 수치다. 80년대생 임원을 둔 기업은 전체 조사대상 100곳 중 27곳이다. 이 가운데 외국인 3명과 총수 일가 및 특수관계인 18명을 뺀 ‘일반인’ 80년대생 임원은 35명으로 조사됐다.
일반인 임원(35명) 중에선 1980~84년생이 31명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총수 일가와 외국인을 제외하고 80년대생 임원이 가장 많은 기업은 국내 최대 플랫폼 기업 네이버(8명)다. 그 다음으로 씨제이(CJ)제일제당(4명), 에스케이(SK)텔레콤·엘지(LG)생활건강·메리츠화재(3명), 삼성전자(2명)가 뒤를 이었다. 총수 일가와 외국인을 뺀 80년대생 임원을 한 명이라도 둔 기업은 조사대상 100곳 중 14곳이다. 100대 기업만 따졌을 때, 그룹별로는 에스케이·엘지·메리츠금융이 각각 5명, 씨제이가 4명이다. 성별로는 남성 임원이 21명, 여성 임원은 14명이다.
폐쇄적이고 생동감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온 국내 대기업 환경에서 80년대생 임원들이 잇달아 등장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기존의 연공서열 방식에서 벗어나 성과 및 직무 중심으로 인사 제도의 틀을 바꾸는 기업들의 움직임에 갈수록 속도가 붙고 있다는 점이 젊은 임원 발탁의 요인으로 꼽힌다. ‘순혈주의’와 ‘공채 문화’의 자연스러운 붕괴도 외부 인재의 수시 영입 전략과 맞물리면서 임원 구성 변화의 자극제가 되고 있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시이오(CEO)스코어의 박주근 대표는 “최근 많은 기업이 공채를 없애고 수시 채용으로 바꿨다”며 “공채 기수를 기반으로 한 연공서열이 사라지면서 직급 체제에 변화 생겼고, 외부 스카우트를 통해 직무 위주로 배치하는 기업 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30대 임원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융·복합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 물결 속에서 기업들이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건 현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미 우리 경제는 ‘과거에 잘 팔리던’ 상품을 더 잘 만들기만 해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에 와 있다. 이에 제조업과 첨단기술의 융합 등 시장의 급박한 변화를 재빠르게 파악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젊은 인재들을 기업들이 의사결정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얘기다. 헤드헌팅 업체인 유니코써치의 김혜양 대표는 “과거에는 기업들이 주로 동종 업계의 경력자를 원했다면 최근 2~3년 사이에는 이종 업종의 채용이 활발하다”며 “유통·소비재·제조업·금융 등 분야를 막론하고 기업들의 디지털 변환이 가속화하면서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등에 밝은 젊은 정보통신기술 전문가들을 채용하려는 추세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말했다. 엘지전자의 인사 담당자도 젊은 임원 발탁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 “혁신과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젊은 인재를 과감하게 발탁하는 것이 급변하는 사업환경에 빠르게 대응할 뿐 아니라 젊고 유연한 조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4대 그룹 총수의 실질적 세대교체가 마무리되는 등 국내 재벌 대기업 총수의 연령대가 상대적으로 젊어진 점이 이런 흐름을 더욱 부채질 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백기복 국민대 교수(경영학)는 “기업 총수들이 3~4세로 내려가면서 젊어지니 자신의 나이에 맞는 자기 사람을 쓰려 한다. 이 과정에서 임원들의 나이도 젊어진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앞으로 80년대생 젊은 실무 임원들의 발탁이 빠르게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일반인 80년대생 임원(35명)은 현재 국내 100대 기업 전체 임원 수(약 7천명)의 0.5%에 그친다. 100대 기업 중 일반인 80년대생 임원을 한 명이라도 둔 기업은 14곳뿐이다. 아직은 우리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주요 대기업의 의사결정 최정점 구조에서 의미있는 ‘변수’가 되긴 어렵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걸어온 길에 비춰볼 때, 80년대생 임원의 등장 흐름이 갖는 의미를 진지하게 짚어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80년대생의 특수성’이 있어서다. 흔히 밀레니얼 1세대라 불리는 80년대생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수혜를 동시에 받고 자란 최초의 세대란 평가를 받는다. 최근 일각에서 이들을 ‘추월의 세대’라 이름붙이는 이유다. 세계경제에서 한국 경제의 위상 변화를 온몸으로 절감한 첫 세대이자, 양극화와 불평등이라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처음으로 맞닥뜨린 세대이기도 하다.
과연 주요 기업의 임원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80년대생들은 어떤 리더십을 보여주며 우리 기업을 혁신시켜낼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이들이 수직적 조직문화에 익숙한 선배 세대와 개인주의적이며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후배 세대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일종의 ‘낀세대 역할론’이다. 김혜양 유니코써치 대표는 “60~70년대생의 카리스마 리더십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90년대생의 자유분방함을 포용하는 브릿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백기복 국민대 교수도 “권위주의 시절엔 가부장적 리더들이 있었고 고도 성장기엔 ‘끈끈한 유대'를 강조하는 한국형 리더십이 있었다”며 “80년대생은 최근 기업들의 글로벌화로 나타나는 ‘임파워링(Empowering) 리더십'을 발휘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임파워링 리더십이란 리더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는 게 아니라 권한을 위임해주고 합리적으로 보살펴주는 리더십을 뜻한다.
한편으론 이들이 리더로서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전까지 숱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조직·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는 “80년대생은 앞으로 코로나19 이후 처음 임원이 된 세대로서, 다양성 존중에 대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대를 이끌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그는 이를 두고 마치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이 재즈 밴드의 리더로 간 격이라는 비유를 들었다.
80년대생 임원들이 선배 세대의 노하우를 물려받은 뒤 이를 후배 세대에 맞는 방식으로 매끄럽게 실현할 수 있을 만큼 오랜 기간 임원직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도 나온다. 기업 경영 환경이 코로나19로 인해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어서다. 백기복 교수는 “과거처럼 창업 공신으로 한번 임원이 된 뒤 60살까지 유지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본다”며 “젊은 임원들 스스로도 자기의 사업 기회가 생기면 언제라도 떠나는 걸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80년대생 임원 집단이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기엔 당분간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송채경화 박수지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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