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새 공정거래위원장에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지명했습니다. ‘재벌개혁 전도사’로 불리는 김 후보자는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경제개혁연대 소장 등을 역임하며 재벌기업의 탈법·불법 상속과 낡은 지배구조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왔습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재벌개혁에 앞장서겠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는 정경유착이란 말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고 강조했었죠.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인사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주목할 만한 장면이 있습니다. 지난해 12월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국정조사특위 1차 청문회입니다. 1988년 ‘일해재단 청문회’ 이후 28년 만에 재벌 총수들이 한꺼번에 불려 나왔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등 9명은 종일 미르·케이(K)스포츠재단 기금 출연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정경유착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특히 이 부회장은 최순실씨 모녀 부당 지원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을 동원한 의혹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동문서답하거나 의미 없는 사과만 반복해 ‘송구재용’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다른 총수들의 답변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답답하게 진행되던 ‘재벌 청문회’를 뻥 뚫어준 것은 참고인으로 나온 김 내정자의 ‘사이다’ 발언들이었습니다. 길지 않은 발언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 부회장 주장을 반박하거나 재벌 의사결정 구조의 한계를 짚었습니다. 공정거래위원장 지명을 계기로 당시 그의 발언들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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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미래전략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책임을 지지 않아”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삼성그룹 지배구조에 대한 국내 최고의 전문가”라는 소개말로 김 내정자를 참고인으로 부른 이유를 밝혔습니다. 손 의원은 첫 질의를 시작하기 전 김 내정자에게 “국민들이 잘 알 수 있게 삼성그룹의 의사 결정 구조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김 내정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성그룹의 의사 결정은 각 계열사의 이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전략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무리한 판단을 하게 되고요, 이것이 심지어는 불법 행위로 이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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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성공의 원인이 지금은 실패의 원인이 되고 있다”
손 의원은 이 부회장에게 삼성물산 합병 보고를 언제 처음 받았는지 물었지만 이 부회장은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즉답을 피했습니다. 손 의원은 “합병 훨씬 이전인 2015년 4월부터 최순실이 되었든 청와대가 되었든 이미 합병 문제를 알리고 사전 작업을 치밀하게 추진해 왔다는 정황이 있다. 청와대 안종범도 이미 4월에 합병 건을 알고 작업을 했는데 이 부회장은 당연히 4월 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손 의원은 다시 김 내정자에게 기존 재벌 시스템의 한계에 대한 의견을 부탁했고 김 내정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성그룹은 자신의 성공을 ‘황금의 삼각 축’으로 설명합니다, 회장의 영도력, 미래전략실의 기획력, 그 다음에 계열사의 전문경영력. 과거에는 그것이 성공의 원인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실패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변화한 주변 환경에 맞춰 삼성그룹이 환골탈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요. 이재용 부회장의 결단과 즉각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이 부회장은 청문회에서 미래전략실 폐지를 약속했고, 지난 2월28일 실제로 폐지됐습니다. 이날은 최순실 국정농단을 수사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이 부회장을 구속기소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 부회장은 삼성 전·현직 임원 4명과 함께 박 전 대통령에게 합병 등 부정한 청탁을 하고 433억원의 뇌물을 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3세 승계로 가는 중요한 과정”
청문회에서 이 부회장은 “최순실의 존재를 언제 알았냐”는 의원들의 간단한 질문에 “정말 내가 언제 알았는지, 정말 기억이 안 난다”고 ‘모르쇠’로 일관하면서도 “합병은 승계와 무관하다”고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대가성 여부와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손 의원은 김 내정자에게 “합병이 승계와 무관하다는 이재용 증인의 답변에 대해 동의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김 내정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갖는 의미를 간단하게만 설명 드리면, 제일모직은 과거에 삼성에버랜드였습니다. 이름이 바뀐 것이지요. 따라서 이재용 부회장이 갖고 있는 재산의 거의 대부분을 제일모직의 주식으로 갖고 있었고요.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의 주식을 많이 갖고 있는 그룹의 지주회사였습니다. 따라서 이 두 회사의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의 재산을 그룹 전체의 사실상 지주회사의 주식으로 바꾸는, 삼성그룹의 3세 승계 과정의 완성지는 아니지만 거기로 가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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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약 3500억~8000억 이상 손해가 났다는 결과 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차 청문회에서 이 부회장의 ‘재산’을 끄집어내 화제가 됐습니다. 박 의원은 “지금까지 8조의 재산이 불어났는데 상속세·증여세라고는 16억원밖에 안 내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재산이 증식된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부회장은 “저는 모든 회사를 더 열심히 키워서…”라며 동문서답하다가 “제가 부족한 것이 많다”는 말로 답변을 끝냈습니다. 박 의원은 “그것을 사자성어로 불로소득이라고 한다. 그 불로소득이 정경유착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선대부터 지금까지 전통으로 내려왔다”고 꼬집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 의원은 김 내정자에게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합병을 찬성함으로써) 국민들이 얼마나 손해를 봤느냐”고 물었고 김 내정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민연금 투자위원회에 제출된 회의 참고자료에 의하면 약 3500억의 손해가 있다고 사전적으로는 계산이 됐고요, 사후적으로 보면 시점에 따라서 다르지만 한 8000억 이상의 손해가 났다는 그런 계산 결과도 있습니다.”
■ “우리나라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얼마나 엉망인가”
1차 청문회의 또 다른 ‘스타’는 주진형 전 한화증권 대표입니다. 손 의원은 주 전 대표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냈다가 부당하게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에게 발언권을 줬습니다. 주 전 대표는 직접 ‘합병 반대’ 보고서를 낸 뒤 자신에게 가해진 각종 압력을 폭로했습니다. 주 전 대표는 “한화그룹에서는, 뭐 우리나라 재벌들이 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일종의 조직폭력배들이 운영하는 방식과 똑같아서 일단 누구라도 한 마디 말을 거역하면 그것을 확실하게 응징해야 다른 사람들이 말을 따라간다고 생각하는 그런 논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 내정자는 주 전 대표의 말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한화그룹에서 참모 조직이 경영기획실인데요,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거기 실장을 하고 있는 금춘수씨가 주진형 사장에게 물러나라는 얘기를 했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회장의 뜻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김승연 회장은 한화투자증권의 주식을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등기이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분이 상장회사에서 주주의 뜻에 의해서 뽑힌 사장을 물러나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얼마나 엉망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은 경제생태계를 망쳤고, 재벌 지배구조는 스스로를 망치고 있다”
청문회 막바지, 손 의원은 출석 의무가 없음에도 국정조사를 위해 참고인으로 나와 준 김 내정자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손 의원은 마지막 발언 시간 중 50초를 김 내정자에게 줬습니다. 김 내정자는 ‘재벌 청문회’ 또는 ‘삼성 청문회’로 불리는 이 날의 청문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앞으로 공정거래위원장으로서 보여 줄 행보에 대한 ‘힌트’이기도 합니다.
“한국 경제의 성장 과정은 재벌의 성장 과정이기도 합니다. 총수와 그 비공식 참모 조직에게 모든 정보가 집중되고 모든 의사결정권이 집중되는 재벌체제는 경제개발의 초기 단계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은 경제생태계를 망침으로써 중견·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고요. 재벌의 지배구조는 이제 스스로를 망치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환골탈태해야 되고 그것이 바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