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자체가 나의 성장이 되는, 사회적인 신분상승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숙의 발판이 되는 길은 정말 없을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일터, 일에서 삶의 의미를 구현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제8회 아시아미래포럼 둘째 날인 24일 오전 ‘일터에서의 행복과 미래’ 세션에서 특강에 나서는 이병남(61·
사진) 전 엘지인화원장은 그의 책 <경영은 사람이다>(2014)에서 이렇게 적었다. 대기업 임원의 경영철학에 등장하는 노동자의 ‘성장’이나 ‘성숙’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보인다. 미국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다 1995년부터 올해 초 퇴임할 때까지 21년 동안 엘지그룹의 인사와 교육을 총괄해오며 그가 계속 고민해온 화두다.
경영이 떳떳하지 못하면 복지도 대증요법에 불과
그는 한국에 돌아와 이른바 ‘재벌회사’에 다니는 대기업 직장인들을 지켜보며 그들이 지닌 양면적 정서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남보다 좋은 근무 환경과 보수를 받으며 일한다는 만족감의 이면에는 놓여있는 뭔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찜찜함이나 냉소” 같은 것이다. 순환출자로 복잡하게 얽힌 재벌들의 취약한 지배구조 탓에 지배권의 정당성이 부족해지고 이것이 조직문화로 이어지며 노동자 개개인의 자부심이나 행복감에까지 직결된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일터의 조건으로 “기업의 존재목적이나 경영철학 같은 근본적인 요소들이 올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복지나 요즘 유행하는 사원 ‘기 살리기’ 프로그램 같은 건 대증요법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전 원장은 기업의 존재목적으로 주류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윤 극대화’는 ‘가치 극대화’로 무게중심이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지속가능성’의 고민에서 기업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독일 제약회사 메르크(머크), 스웨덴의 발렌베리 등 100년 이상 탄탄하게 성장해온 유럽 기업의 예를 보면 단순히 주주의 이익뿐 아니라 협력회사, 종업원, 고객과 지역사회에까지 유익함이라는 가치를 제공해왔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단지 월급과 복지제도뿐일까. 이 전 원장은 “지속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을 제공해야 한다”며 “직원들은 일이 힘들더라도 자신이 제대로 인정받고, 성장해나간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조직의 배려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이번 강연에서 주제로 내세운 ‘인간존중 경영’의 핵심이다.
직원들의 성장감이 지속가능한 경영의 핵심
사실 ‘인간존중 경영’은 그의 새로운 제안이 아니라 엘지그룹에 입사했을 때 벽에 걸려 있던 경영이념이었다. 직원 입장에서 보면 그저 액자에 걸려 있는 구호 같은 것이었는데 97년 외환위기 때 격렬했던 계열사 파업을 지켜보면서 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고 한다.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을 하면서 반도체 사업을 현대에 넘기게 됐다. 이 과정에서 파업이 일어나며 직원들이 ‘인간존중 경영을 한다면서 사람을 이렇게 자를 수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간존중이란 기업이념은 상황에 따라 구조조정과 인력조정을 피할 수 없는 기업경영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이후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존중 또는 존엄성이 중요한 이유는 생산요소 가운데 노동만이 노동력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영학 용어 중에 ‘심리적 계약’이라는 말이 있다. 근로계약에는 적시하지 않는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암묵적인 계약이다. 꼭 명시하지 않아도 회사는 나에게 이 정도를 해주겠지 하는 일종의 신뢰관계다. 계약서상의 문제가 없더라도 심리적 계약관계가 깨지면 노동자는 배신감과 같은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가 2000년부터 8년 동안 그룹 인사를 총괄하면서 역점을 둔 것은 ‘인간존중 경영’을 인사 프로세스에 녹이는 작업이었다. 노동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중은 업무 성과를 온전히 평가하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고 기업의 지속가능성은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실현된다는 게 이 전 원장의 설명이다.
그러나 기업 인사정책에 흔히 등장하는 “동기부여”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경영학 교과서에 자주 언급되는 모티베이션(동기부여)은 좋은 뜻에서 처음 나왔지만 매니퓰레이션, 즉 일종의 심리조작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실을 왜곡시켜서 당의정처럼 미래를 포장하는 자기계발서처럼 말이다. 그는 모티베이션 대신 “인스퍼레이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동기를 부여, 즉 주입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본래 가진 생기를 북돋워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급여가 올라가거나 승진을 통해 받는 행복의 효과는 그리 길지 않다는 게 실증 연구로도 여러 번 확인됐다. 노동하는 인간이 가진 본연의 욕구나 자발성을 꺾지 않고 북돋는 것이야말로 조직관리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중한 준비 없는 공공부문 성과평가제 위험
직원에 대한 진정한 배려가 ‘성장감’에서 오는 것이라면 올바른 성과 평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이런 점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성과평가제에 대한 우려를 내놓는다. 그는 “성과주의 인사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성과 측정 방법인데 지금까지 인사관리에서 발전시킨 측정법은 매출이나 영업이익, 시장점유율 같은 수치적인 것에만 집중돼 있다”며 “기업에서도 이와 같은 극단적 계량화 방식에 문제 제기가 나오고 있는 마당에 특수한 가치를 실현하는 공공서비스가 깊은 고민 없이 피상적인 지표들로 성과를 측정한다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조직관리의 핵심은 리더십이라고 강조했다. “권위주의로 조직을 이끌고 나가는 시대는 끝이 났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야말로 리더십의 단단한 기반이다. 권위가 사라진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지금 전 국민이 경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회와 마찬가지로 기업 역시 올바른 권위를 지닌 리더십만이 인간존중의 공동체적 노사관계를 실천할 수 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