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3월10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싱크탱크 광장
제20대 총선 선거운동이 달아오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김종인 전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전면에 내세워 ‘경제심판론’을 들고나온 데 이어 새누리당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핵심 경제 브레인이던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해 맞불을 놓고 있는 게 특히 눈길을 끈다.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고 공천을 둘러싼 각 당의 내부갈등이 장기화하면서 정책은 뒷전에 밀리는가 싶었는데, 선거일이 성큼 다가오면서 주요 정당마다 ‘화끈한’ 경제정책을 내놓으며 표몰이에 나서고 있다. 특히 ‘경제정책통’이 지휘하는 양대 정당의 ‘정책 경쟁’이 볼만하다.
■ 새누리당의 ‘한국판 양적완화’론
새누리당은 적극적인 거시경제정책을 펼치겠다며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 ‘보다 과감한 금융정책’을 주문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한국은행이 산업은행 채권을 인수해 기업 구조조정을 원활히 하고,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증권도 가져와 주택담보대출 상환기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가계부담을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2007~08년 금융위기에 대응해 몇몇 선진국 정부가 취했던 ‘돈 풀기’ 정책에 빗대 ‘한국판 양적완화(QE)’로 명명된 정책들이다.
이 정책은 발표 직후부터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다수의 통화정책 전문가들은 지금 우리 경제가 어렵기는 하지만 양적완화를 내세울 상황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양적완화란 기준금리가 하한선(0%)에 가까워 더 이상 내릴 수 없을 때 중앙은행이 추가 유동성 공급을 위해 구사하는 정책인데, 현재 기준금리는 1.5%로 아직 금리정책의 여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새누리당의 제안대로 한은이 시중은행·국책은행의 채권을 인수할 수야 있지만, 그것은 양적완화와는 다른 별도의 정책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 중앙은행의 독립성·중립성
이론적인 쟁점은 제쳐두고라도 새누리당의 ‘한국적 양적완화’ 주문이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해친다는 걱정이 들린다. 대통령을 등에 업은 집권 여당이 총선 공약으로 중앙은행에 특정 역할을 주문하는 것이므로 독립성을 해칠 소지가 있고, 주문의 내용이 자칫 특정 집단에 혜택을 주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으니 중립성에도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 경제가 이례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으니 정부로서는 가능한 정책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 중앙은행도 예외일 수 없고, 어떤 정책이 설령 특정 집단에 비대칭적인 편익을 주더라도 그것이 경제 전체를 위해 필요하면 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선 선진경제권에서 실행 중인 양적완화라는 비전통적 정책 자체가 그러한 절박성을 반영한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있다. 선진경제권과 국제경제기구의 경제학자·정책가들이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한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메시지를 공공연히 내보내고 있다. 정부 재정정책의 중요성에 다시금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 노동당 당수로 뽑힌 코빈이나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경합 중인 힐러리와 샌더스 모두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통해 경제를 살려내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 각국은 재정지출에 필요한 세수기반 확충을 위해 국내적·국제적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결과, 하락 추세이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조세부담률(국내총생산 대비 조세 총량)이 2009년 이후 상승세로 돌아섰다.
한국은 정반대다. 2007년 19.6%까지 올랐던 조세부담률은 이른바 ‘엠비(MB) 감세’로 크게 떨어진 뒤 정체하다가 박근혜 정부 들어 다시 줄고 있다. 조세수입이 적다 보니 이렇다 하게 하는 일이 없어도 정부 부채는 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당 의원들은 한은에 대해 ‘지금 재정여력이 많지 않으니 중앙은행이 좀 나서야 한다’는 주문을 틈만 나면 내놓는다. 한은의 역할 강화를 촉구하는 새누리당 공약을 보며 ‘독립성 침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은에 ‘보다 과감한 금융정책’ 주문
기업구조조정·가계부담 완화 노려
미국·영국 ‘적극적 재정정책’과 대조
전문가 “금리정책 여력 남아” 회의적
“중앙은행 독립·중립성 훼손” 우려도 ■ 한은 독립은 ‘경제민주화’ 문제 이런 우려를 ‘기우’로 치부할 수 없는 건 한은을 둘러싼 저간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한은 독립성이 명목상으로나마 확보된 건 최근의 일이다. ‘경제민주화’가 한창 화두였던 3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한은은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로 불릴 정도로 정부 종속이 심각했다. 통화신용정책을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가 당시엔 금융통화‘운영’위원회로 불렸다. 실질적인 금융통화정책은 재무부가 결정하고 한은은 ‘운영관리’만 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나마 금융통화운영위원장도 지금처럼 한은 총재가 아닌 재무장관이 맡았다. 재무장관이 심지어 한은 감사 임명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한은 독립은 경제민주화의 전제조건’이라는 목소리가 공공연히 터져나온 것도 당연하다. 특히 1987년 6·29선언 이후 급물살을 탄 개헌 움직임 속에서 한은 독립성을 헌법에 명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한은 직원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관철되지 못했다. 1년여의 진통 끝에 같은 해 10월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경제민주화 조항’(119조 2항)을 담고 있었지만, 한은 독립성 명문화로까지 나아가진 못했다. 대신 김봉호 통일민주당 의원의 발의로 한국은행법 개정안이 제출되었으나 제대로 논의도 못한 채 자동폐기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몇 차례 입법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좌절되고, 한국은행법은 1997년에 와서야 비로소 대폭 개정돼 현재와 비슷한 틀을 갖추게 된다.
■ 경제민주화 시대, 중앙은행의 역할
애초 한은이 ‘재무부 출장소’로 전락한 건 박정희 정부에서다. 본래 한은은 법규상 독립성을 인정받고 있었지만, 1962년 한국은행법 1차 개정을 통해 재무부의 산하기관으로 사실상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이번 새누리당의 한국식 양적완화론이 정치·사회 전반에 걸친 보수화 움직임의 연장선에서 해석될 여지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사정을 돌이켜보면 ‘경제민주화 전도사’를 자임하는 김종인 대표가 새누리당의 한국식 양적완화론을 두고 경제민주화 역행이라고 비판하지 않는 것도 흥미롭다. 아마도 그가 생각하는 경제민주화 범주에 한은 독립성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0년 전 한 일간지는 당시 김종인씨가 속해 있던 민정당이 한은 독립과 관련해 ‘국가경제정책과 통화관리의 밀접한 상관관계에 비추어 중앙은행의 중립성을 헌법에 명시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할’ 사안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매일경제신문> 1987년 7월20일치). 1987년 개헌 당시 경제민주화의 폭은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했던 것이다. 김종인 대표는 그중 상당히 절충적인 한 입장을 대변할 뿐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가 다시 화두로 등장한 지금,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희미해진 경제민주화의 의미들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한은의 역할과 의의도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다. 마침 국회도 곧 바뀌고 한은 금통위원도 교체된다. 이례적인 경기침체와 사상 초유의 가계부채 1200조원 시대, 경제의 건전성과 민주성을 증진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역할은 무엇인가?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gg@hani.co.kr
한국은행 기준금리 변화추이
기업구조조정·가계부담 완화 노려
미국·영국 ‘적극적 재정정책’과 대조
전문가 “금리정책 여력 남아” 회의적
“중앙은행 독립·중립성 훼손” 우려도 ■ 한은 독립은 ‘경제민주화’ 문제 이런 우려를 ‘기우’로 치부할 수 없는 건 한은을 둘러싼 저간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한은 독립성이 명목상으로나마 확보된 건 최근의 일이다. ‘경제민주화’가 한창 화두였던 3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한은은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로 불릴 정도로 정부 종속이 심각했다. 통화신용정책을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가 당시엔 금융통화‘운영’위원회로 불렸다. 실질적인 금융통화정책은 재무부가 결정하고 한은은 ‘운영관리’만 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나마 금융통화운영위원장도 지금처럼 한은 총재가 아닌 재무장관이 맡았다. 재무장관이 심지어 한은 감사 임명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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