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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실패를 더 많이 생산하고 ‘혁신 위한 공공재’로 축적을

등록 2016-02-04 19:52

2013년 9월 경기도 화성에 있는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남양연구소)에서 연구원이 소음진동(NVH) 시뮬레이션 기기에 앉아 가속페달을 밟고 핸들을 움직이면서 자동차 소리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2013년 9월 경기도 화성에 있는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남양연구소)에서 연구원이 소음진동(NVH) 시뮬레이션 기기에 앉아 가속페달을 밟고 핸들을 움직이면서 자동차 소리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싱크탱크 광장
“샤오미뿐만이 아니다. 샤오미 뒤에 엄청난 숫자와 양으로 존재하는, 막대하게 축적된 실패들이 우리에겐 무서운 것이다.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 삼성 갤럭시 뒤에 (혁신을 위한) 실패를 과연 누가 하고 있는가?” 요즘 장안의 화제를 모으고 있는 책 <축적의 시간> 공동저자인 이정동 서울대 교수(산업공학)가 지난 1월27일 <한겨레>와 만난 자리에서 던진 질문이다. 샤오미 뒤편에는 ‘치후360’ 등 100개 넘는 중국 스마트폰 브랜드들의 ‘혁신적 실패작’들이 있다. “시장에서 실패라는 건 외부경제효과를 가진 바람직한 양(+)의 공공재다. 개인들에게 성패의 책임을 맡기면 누구나 실패를 줄이려고 한다. 즉,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균형 수준보다 실패가 과소공급될 수밖에 없다. 국가가 실패 위험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해야 실패가 더 많이 공급되고, 그런 실패 사례들을 공동으로 축적해야 원천기술 등에서 혁신이 더 많이 일어날 수 있다.” 결국 이 교수의 혁신론은 “실패를 더 많이 생산하고 축적하자”는 얘기다. 더 많이 실패하자? 우리나라 기업이나 원천기술 연구개발(R&D) 환경에서는 엉뚱한 얘기로 들릴지 모른다. 사실 ‘실패’라는 말은 경제·경영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는다.

■ 실패는 공공재다!

실패는 왜 필요하고 요청되는 것일까? 실패를 일부러 장려하자는 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실패는 그 자체로만 보면 줄여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산업·기업 경쟁력과 관련된 모든 모험적 기술혁신은 커다란 실패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실패는 이제 ‘더 많이 생산해 내야 할’ 재화가 된다. ‘실패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하타무라 요타로 도쿄대 공학부 명예교수는 “있어서는 안 될 실패도 있지만, 새로운 도전에 나설 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필요한 실패’도 있다. 실패의 책임을 묻기보다는 실패를 공유함으로써 집단의 지혜를 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실패든 감추면 병이 되지만 드러낼수록 성공과 혁신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다.

무릇 실패는 시장경쟁이 치열할수록 더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들은 모험사업·투자에 나섰다가 실패하면 해당 임원과 부서를 곧바로 문책하기 일쑤다. 이에 따르는 ‘실패 두려움’이 지난 수십년간의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기업 내적인 혁신 역량을 취약하게 만들어왔다는 지적은 새삼스럽지 않다. 실패 두려움은 국가 연구개발 부문에서 흔히 나타났다. 2014년에 정부가 직접 투입한 연구개발사업비는 17조6395억원으로, 생명공학 등의 분야에 총 605개 사업에서 5만3493개 세부과제가 추진됐다. 주로 정부출연 연구기관, 대학, 대·중소기업에 지원된다. 그런데 현행 국가 연구개발 주제 선정과 관리 및 평가시스템은 3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실패를 거의 용인하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데 있다. 박희재 서울대 교수(전기정보공학)는 <축적의 시간>에서 “대학교수 중에 전공과 관련된 산업 경력이나 현장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단히 적거나 거의 없다”며 “국가 연구개발 예산에서 시장이나 산업 현장과 동떨어진 연구를 하는 비중이 너무 높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연구를 시작한 지 6개월~1년 지나면서부터는 산업 현장에 필요한 것보다는 평가를 잘 받기 위한 연구가 되기 시작한다”고 덧붙였다.

모든 모험적인 기술혁신들은
커다란 실패를 동반하기 마련
샤오미 성공엔 많은 실패 바탕
실패를 더 많이 생산·축적해야

미·일 등은 실패위험 국가 보장
실패사례 DB화하고 공개까지
한국은 실패땐 문책하기 일쑤
‘성실 실패’에도 적극 지원해야

■ 실패를 존중하고 축적하는 선진국들

영국 런던에 소재한 바이오의학중앙센터(BioMed Central)의 과학자들은 2002년 <바이오의학의 부정적 연구성과 저널>(Journal of Negative Results in Biomedicine)이란 새로운 학술지를 창간했다. 놀랍게도 이 저널은 주로 바이오의학 분야의 연구 실패 사례를 모아두고 있다. 여기에는 ‘휴대폰 사용과 뇌종양 유발’에 대한 논문을 비롯해 200여개 실패 사례가 공개되고 있다. 이 저널의 온라인 누리집은 “엄밀한 실험에서 나타난 부정적 결과나 결론은 공표돼 토론에 부쳐져야 한다. 성실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사례는 뜻밖에도 일반적이고 지배적인 처방이 갖는 근본적인 결점과 장애를 드러내준다”고 설명한다.

연구 실패 위험을 국가가 보장해주는 제도나 관행은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10여년 전부터 본격화했다. 미국에는 국립과학재단(NSF) 등이 주도하는 고위험 혁신 연구를 위한 ‘변혁적 리서치’(Transformative Research)라는 게 있다. “격렬한 시장경쟁 환경에서 단순히 혁신을 추구하는 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기업과 국가는 경제적 이점을 가져다줄, 실패 위험을 동반하는 변혁적 연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표방하는 가치이다. 2007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서명한 ‘미국경쟁력강화법’은 기술 및 과학에서 높은 실패 위험을 수반하는 혁신 연구의 장려가 국가의 책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일본은 실패 경험을 국가 수준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과학기술진흥기구(JST)는 2005년 3월부터 ‘실패 지식 데이터베이스’를 누리집에 올려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문부과학성이 주관하는 ‘실패지식활용연구회’에도 도시바와 후지쓰, 미쓰비시중공업 같은 대기업은 물론 대학·공공연구기관 등이 발표한 실패 사례들이 총망라돼 있다. 기계·재료·화학물질·플랜트건설 등 4개 분야에서 1천여개의 데이터가 축적돼 있는데, 아스팔트 응고처리시설에서의 화재폭발 사고와 같은 전형적인 실패 사례를 모은 ‘실패 100선’ 목록도 있다. 실패도 획득된 ‘지식’이며, 실패 지식은 전달되고 공유되어야 한다는 취지이다. 일본 정부는 2001년부터 5년간 이 데이터베이스 구축에만 10억엔을 투입했다. 또한 실패 사례들을 단순히 한곳에 모아두는 작업에 그치지 않았다. 실패 경험을 유용한 지식으로 삼을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분석·정리하고, 실패의 원인과 행동·결과를 분류하고 체계화한 이른바 ‘실패 만다라’까지 그림으로 도식화해 제시하고 있다. 분야별로 범주화돼 있고 키워드 검색까지 가능하다.

■ 실패를 꺼리는 국가와 금융

우리나라에서 국가 연구개발 예산을 운용하는 중앙부처 및 기관은 33개에 이른다. 약 7만개에 이르는 국가지원 연구개발 과제를 보면 도전적인 과제를 피하고 ‘달성하기 쉬운’ 목표를 제시한 게 대부분이다. 이런 과제들은 정부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수준의 성과를 내놓기 어렵다. 실패 위험이 클 수밖에 없는, 난도 높은 과제를 발굴·지원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조시훈 미래창조과학부 서기관(성과평가혁신총괄과)은 “연구과제를 관리하는 17개 전문기관별로 실패 사례들을 자율적으로 모아두고 있지만 부처간에 공유·집적하지는 않고 있다”며 “실패한 과제들을 사례집으로 모아 축적하는 것도 검토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이 국내총생산(GDP)이나 전체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 꽤 높은 편이다. 그러나 질적으로 따지면 예산 투입이 매우 비효율적이다. 이른바 ‘성실 실패’의 개념적 기준을 마련해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조 서기관은 “성실 실패에 대해서도 예산을 지원하는 쪽으로 정책이 전환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정동 교수는 “실패에 따른 시장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 관련 정보와 지식에 기반해 머리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치밀한 분석과 정보에 기반해 기업의 연구개발 혁신을 유도하는 구실은 주로 은행이 맡아야 한다. 그러나 국내 은행들은 혁신을 위한 진정한 ‘투자’ 역량은 배양하지 못한 채 안전한 담보대출 위주로 영업을 해왔다. 이에 따라 은행은 흔히 경제의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꼽혀왔다. 투자는 본질적으로 실패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은행들은 위험을 제대로 평가하는 작업부터 서툴다. 외환위기 이후 “상업은행에서 투자은행(IB)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부르짖은 지 20년이 됐음에도 여전히 구호에 그치고 있는 데는 이런 사정이 깔려 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지난해 9월 말 예금취급기관의 산업대출금 총잔액은 772조9천억원이다. 이 중에서 시장 위험을 은행이 함께 떠안는 진정한 ‘투자’ 성격은 어느 정도일까? 박종세 한국은행 조사역(금융통계팀)은 “대출해준 기업의 실패 위험까지 분담하는 진짜 투자인지 단순한 담보대출인지 성격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며 “은행들은 투자를 한다기보다는 수익창출을 위한 담보대출과 신용대출이 주를 이룰 뿐”이라고 말했다. 고객 기업의 연구개발 능력과 미래 성장성까지 제대로 파악한 가운데 긴밀한 ‘관계금융’을 통해 실패 위험을 분담하는 진정한 투자는 거의 없고 여전히 ‘전당포’ 수준의 안정적인 담보대출에 머물고 있다.

사모펀드운용사인 디스커버리인베스트먼트의 장하원 대표는 “우리나라 전체 금융권이 시중은행의 이런 전근대적 영업 방식에 포섭돼 있다”고 한탄한다. 자산 기준으로 상업은행이 전체 금융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85%로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장 대표는 “상업은행이 투자은행을 하겠다는 건 안 되지만, 자산운용사 같은 비은행 금융기관들은 경제에서 ‘투자자’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금융산업은 금융지주회사 체제에서 투자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지주회사 틀 속에서 은행의 영업 및 수익 논리가 계열 자산운용사·증권회사·투신사 등 실패 위험을 감당해야 할 ‘투자’기관들까지 지배·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혁신을 이끌어내는 진정한 기업투자가 절대적으로 결핍인 상태에 있다는 얘기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이에 따른 ‘실패 축적의 빈곤’은 한국 경제가 활력을 잃은 채 위기를 맞고 있는 한 배경이다.

조계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동향분석센터장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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