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
규제를 겨냥해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이다. 규제 개혁은 김대중 정부 이후 모든 정부가 강조했으나 이 정도 수위의 발언을 한 대통령은 없었다. 친기업 기조를 앞세운 이명박 전 대통령마저도 이러한 전투적 표현은 쓰지 않았다.
이 발언은 지난해 3월 전후에 쏟아졌다. 집권 첫해인 2013년에도 ‘규제 개선을 중심으로 한 투자활성화 대책’이란 소제목이 붙은 ‘무역투자진흥회의’를 네차례 진행하며 규제 개혁은 추진됐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이 발언 이후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무투회의의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차이가 없는 ‘규제개혁장관회의’가 신설됐고, 규제 총괄기능도 기획재정부에서 총리실로 격상됐다. 규제 개혁의 판이 커진 것이다.
규제 개혁은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 박 대통령 임기 말인 2017년까지 기존 규제 20%를 줄인다는 감축 총량이 제시됐다. 곧이어 각 부처는 규제 개혁 과제 발굴 경쟁에 뛰어들었다. 중복 규제 등을 줄인다며 ‘규제 비용 총량제’라는 제도 도입이 본격 논의된 것도 이즈음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3월 말 텔레비전 생중계로 진행된 첫 규제개혁장관회의에서 “현실 안 맞는 규제는 죄악” “일자리를 규제로 뺏는 것도 도둑질”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은 좋은 규제와 나쁜 규제를 나눠서 개혁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좋고 나쁨의 경계에 있는 규제는 물론 꼭 필요한 안전·환경 규제마저도 국무조정실에서 가급적 없애는 쪽으로 검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당시 살벌했던 분위기를 털어놨다.
집권 2년차를 맞은 박 대통령은 왜 국정의 중심에 규제 개혁을 올렸을까. 전직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2013년 경제 상황을 언급한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할 정도로 2013년은 경제가 나빴다. 그 중심에 기업 투자 부진이 있었다. 기업 투자를 끌어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실제 2013년 설비투자 증가율은 -1.5%에 그쳤다. 금융위기 여파가 컸던 2009년 이후 4년 만에 찾아온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집권 2년차에 규제 개혁이 국정의 중심에 들어오면서 기업과 정부 간의 관계도 뚜렷하게 달라졌다.
대선 전과 집권 초반까지만 해도 정부는 재벌그룹 등 대기업과 일정한 긴장 관계를 형성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뒤 첫 행선지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아닌 중소기업중앙회를 찾았다. 대기업보다 벤처기업을, 수출보다 내수를 강조했다. 이에 따라 친기업을 표방한 전 정부와의 선긋기라는 해석, 대선 공약인 경제민주화 약속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추측 등 재계는 박 대통령과 현 정부의 속내 파악에 전전긍긍했다.
4대 그룹 한 고위 임원은 “현 정부가 집권 첫해 경제활성화 기치를 내걸 때만 해도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규제 혁파를 대통령이 직접 천명하면서 그런 분위기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분위기 변화는 긴밀한 협조로 이어졌다. 규제 개혁 과정에서 기업은 정부의 파트너 역할을 했다. 기업이 건의하면 정부가 받아들이는 형태였다. 규제 개혁의 형식적 추진 주체는 정부이지만, 그 배후에 기업이 있었다는 뜻이다. “규제는 암덩어리”라는 박 대통령의 발언은, 재벌그룹 등 대기업에 투자를 요구하는 공개적 신호인 동시에, 집권 1년차에 형성된 긴장 관계를 풀자는 화해의 손짓이었던 셈이다.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규제 개혁 드라이브는 주춤하는 듯했으나, 박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국무회의에서 “규제는 단두대에 올려 한꺼번에 처리하라”며 다시 규제 개혁의 깃발을 들어올렸다.
세종/김경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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