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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부당 하도급 제재강화’ 말뿐, 감시 인력 동결…경제민주화 실종

등록 2015-02-25 19:57수정 2015-02-26 11:22

박근혜 정부 2년 진단 ④ 경제
‘을의 눈물’ 외면하는 정부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관행 개선 제도와 제재 실적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보일러 등 발전용 설비를 생산하는 중견기업인 ㄱ사는 올해 들어 예상치 않은 자금난에 봉착했다. 지난해 10월 한 대형건설사가 수주한 알제리 화력발전소 2기에 보일러를 납품하기로 계약을 맺고, 자재 구매 등에 200억원을 먼저 지출했다. 하지만 대기업이 지급기한인 지난해 말까지 선급금 130억원을 주지 않은 채 한달 이상 끌면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해당 대기업은 “ㄱ사와 알제리 정부 간의 합작기업 설립이 늦어지면서 자칫 공사에 차질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ㄱ사는 지난해 4월 알제리 정부와 보일러 관련 합작기업을 세워 기술이전, 직원교육 등을 해주기로 하고, 알제리 정부가 발주하는 발전소에 들어가는 보일러를 3년간 독점 공급하기로 했다. ㄱ사는 “계약서에는 합작기업 관련 사항이 한 줄도 없다. 계약서에 없는 내용을 이유로 선급금을 주지 않는 것은 불공정 행위”라고 항변했다. 더욱이 대기업은 이미 발주자인 알제리로부터는 선급금을 받은 상태였다. 최근 대기업은 뒤늦게 선급금을 지급했으나, 40여일간의 지연이자는 주지 않았다.

포항에서 철강제품 포장재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인 ㄴ사는 지난해 여름 이후 황당한 일을 당했다. 주거래처인 포스코 계열의 ㄷ사가 ㄴ사의 대주주인 김아무개씨에게 회사 경영권을 넘기라고 요구한 것이다. 김씨는 몇달을 버티다가 결국 지난해 말 두 손을 들었다. ㄷ사에 밉보이면 어차피 사업이 어렵기 때문이다. ㄷ사의 횡포는 올해도 이어졌다. 지난해 2월 맺은 ‘5년간 장기공급 계약’을 취소하자는 압박이 시작됐다. ㄷ사는 ㄴ사가 난색을 보이자 거래 중단, 단가 인하 등으로 위협했다.

이에 대해 ㄷ사는 “계약 파기를 요구한 게 아니라 단가와 물량 조정 협상 중이다. 경영권 요구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장기공급 계약서에는 5년간 총 공급액이 1442억원이고, 월 3회 이상 납기지연 등의 사유 외에는 계약해지를 못하도록 명시돼 있다. 또 지난해 말 ㄷ사의 요구에 따라 ㄴ사의 대주주와 ㄷ사의 전직 임원 사이에 이미 ‘경영권 인수를 위한 합의각서’가 체결된 사실도 확인됐다. 포스코의 전직 임원은 “오너가 없고 국민기업으로 불리는 포스코의 계열사조차 ‘갑의 횡포’를 부리면 중소기업이 설 자리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계약서에도 없는 내용 이유로
선급금 130여억원 안주고
느닷없이 경영권 내놓으라 압박
‘갑의 횡포’ 그치지 않지만
불공정 하도급 3배 손해배상제 등
제재 제도만 도입, 집행지원은 뒷짐
새 제도 10개 중 3개만 실적

갑의 횡포로부터 을을 보호하기 위한 공정한 거래질서 확립은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다. 공정위의 올해 대통령 업무보고에서도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관행 개선이 최우선 과제로 제시됐다. 대기업들도 그동안 앞다퉈 상생협력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앞의 사례들이 보여주듯 일부 개선 기미가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많다. 이는 공정위가 최근 발표한 현장실태 점검에서도 드러난다. 중소기업 1416곳 중에서 지난해 부당 단가인하 등 4대 불공정 하도급 행위를 경험한 업체가 114곳(8%)에 이른다. 대기업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도 제대로 못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실제 경험 비율은 몇배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갑의 횡포가 근절되지 않는 것은 중소기업과의 상생과, 공정한 거래질서 준수가 대기업의 경영철학으로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한 탓이 크지만, 박근혜 정부가 경제활성화를 이유로 대선공약인 경제민주화를 뒷전으로 밀어버린 게 결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대통령은 대선 이전까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도 경제민주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성장의 과실이 일부 계층에 집중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성장잠재력을 해치고 있다. 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경제민주화로 바로잡아야 한다.”(2012년 7월 대선 출마 선언) 하지만 출범 6개월도 안 돼 공약을 포기했다. 경제개혁연구소의 강정민 연구원은 “박 대통령은 2013년 11월 이후 연설에서는 단 한번도 경제민주화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경제민주화의 주무부처인 공정위가 제구실을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지난 2년간 경제민주화 관련 여러 제도를 도입했다. 총수일가 부당이득 제공 금지, 신규 순환출자 금지, 부당 하도급 행위에 대한 3배 손해배상제 확대 등이 대표적이다. 공정위는 업무량 증가에 맞춰 최소 2~3개 과의 조직 확대를 요청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공정위 간부는 “업무가 대폭 늘었는데도 인원을 동결한 것은 사실상 법 집행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2013년 말 이후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개선을 위해 새로 도입된 10개 제도 중에서 제재 실적이 있는 분야는 3개뿐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신년기자회견에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실현되면 3년 뒤 잠재성장률 4%,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바라보며, 고용률 70%를 달성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경제민주화의 실종과 함께 ‘을의 눈물’은 계속되고, 경제활성화도 ‘공염불’이 되고 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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