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으로 참깨를 베어 든 전명순씨의 얼굴엔 오랜 세월을 견뎌낸 농부의 여유로움이 물씬 배어난다.
[나는 농부다] 전북 변산 전명순 농부
그이가 낫으로 참깨를 베는 몸놀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한결같은 속도로 베어놓을 자리를 오간다. 참깨밭 옆 두 다랑이 논. 드문드문 벼가 비어 있다. 모내고 나서 빠진 자리를 메꾸지 않고 남겨둔 아들의 일 매무새를 두고 그이는 “농사꾼 맞는가 몰러” 혼잣소리를 한다.
빨간 고추가 널려 있는 비닐하우스. “이슬 내리기 전에 밀봉해둬야 곰팡이가 안 펴요. 흔들어봐서 고추씨 소리가 들리면 바싹 잘 마른 거요. 제때 거둬들이지 않으면 거무튀튀해지지.” 조근조근 짚는 대목 켜켜이 그이가 살아온 시간의 지혜가 물씬하다. 전명순(58), 여성치고는 훤칠하게 큰 키와 몸집, 볕에 그을린 티도 안 나는 피부를 보면 평생을 농사지어온 사람 맞나 싶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이날까지 농사일을 놓은 적이 없는 원조 농부다.
거뜨미 마을(전북 임실군 운암면).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실개천 따라 통통배를 타고 40분은 가야 닿는 산골짜기. 구불구불한 재 2개 넘어 20리 길을 걸어 초등학교에 다녔다. “학교 오가며 으름이다 머루다 따먹다가 늦어서 벌 받기도 하고, 대보름이 낀 정월 한달 내내 굿을 노는 어른들 쫓아다니고….” 어릴 적 고향 추억이 눈에 삼삼하기만 하다.
첩첩산중 두메산골. 어슴푸레한 새벽이면 온 식구가 일어나 일하러 나갔다. 어리광 부리고 싶을 아홉살 가시나라도 봐주지 않았다. 이미 열댓살에 동네 품앗이 일을 다녔다. “징그럽게 잠이 쏟아지드만…. 싫고 좋고가 어딨어요. 그냥 삶이었죠.” 열일곱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언니와 집안 농사를 도맡았다. “지게를 지고 겨우내 땔나무하러 다니고. 일도 징하게 많았지라우.” 올망졸망한 세 남동생 뒷바라지하랴 자신을 돌볼 새가 없었다.
“우리 집 농사는 여자들이 다 했제.” 지금 옆집에 모시고 사는 어머니(김점례·83)가 말을 거드신다. 스무살 무렵 언니가 시집가자 그 몫까지 떠맡게 됐다. 어머니에게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집을 떠나 풀무농장에 들어가던 스물세살 때까지. 홀로 남은 어머니는 큰 일꾼이 떠났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 얘기를 꺼내며 그는 와락 솟아오르는 눈물에 말문이 막힌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농한기에 풀무농장 한달 코스 ‘단기대학’을 두어번 다니며 인문학 강의도 듣고, 책을 맛본 것으로는 감질났다. ‘성에 차게 공부 좀 해봤으면….’ 배움에 대한 욕구가 꿈틀거리곤 했다. 풀무농장에서 농사는 물론 살림살이를 고루 배우며 5년을 머물렀다. 3년차 되던 해, 거기 갓 들어온 남편 정경식(56)씨를 만나 결혼하고 2년 뒤에 그들만의 가정을 꾸려 독립했다. 그 공동체에서 마음의 자유를 얻기는 어려웠지만 “바르게 사는 게 뭔지, 바른 농사가 뭔지” 삶의 지표를 추려낼 수 있었다.
17살 때부터 집안농사 도맡다
풀무농장 들어가 5년간 머물며
바른 삶, 바른 농사가 뭔지 깨우쳐
옳다고 해서 외곬 치닫는 건 경계
몸으로 감당 안될 땐 기계도 쓰고
농약도 화학비료도 남용이 문제
일도 하고 문화도 누리며 살았으면 1983년 겨울. 전북 변산으로 이사 가는 그들의 짐은 단출했다. 괭이·삽·호미 등 농기구, 씨앗, 소 한마리, 염소 한마리, 닭 세마리, 쌀 두가마니…. 달랑 이 살림 밑천으로 살아내야 했다. 남의 집, 남의 땅 빌려. 두살배기 아이를 등에 업고 온종일 일하기도 했다. 웬만한 농사일은 거뜬히 해내던 그였지만 한여름 뙤약볕에 비 오듯 하는 땀을 닦으며 속절없이 돋아나는 풀을 매는 일은 힘들었다. 비라도 내리면 푹푹 빠지다가 이내 딱딱하게 굳는 땅이라서 호미질을 도끼질하듯 해야 했다. 힘든 것은 고사하고 먹고살 길이 캄캄해 보여 ‘딱 한번만 농약을 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때도 있었다. 그런 유혹을 이기고 서너해 지나서야 남들만큼 수확할 수 있었다. 10년쯤 지나서야 땅 2000평도 사고, 남부럽지 않은 양옥집도 지을 수 있었다. 2000~3000평 농사로 누구나 이렇게 살아낼 수 있을까? 사시사철 어느 한구석의 땅도 놀리지 않고, 사이짓기, 돌려짓기, 섞어짓기 등 땅의 생명력을 끌어올리는 농사법으로 다품종 소량생산을 척척 꾸려낼 줄 아는 농사 달인쯤은 돼야 수만평 농사짓는 이들에게 맞먹는 벌이가 가능했을 터. “그냥 농사지어, 시중에 냈더라면 어림없었을 거요. 직거래를 터서 제값 받고 유기농산물을 낼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깔끔한 손맛으로 소문이 자자한 그이가 빵도 찌고, 양파나 고추장아찌 같은 절임 반찬류, 효소음료 등 먹거리를 만들어 곁들인 것이 소득에 적잖은 보탬이 됐다. 빚 없이 두 아들이 대학과 대학원을 마칠 수 있도록 뒷받침했고, 논도 4000평 정도 더 마련했으니 농사도 살림도 고비를 훌쩍 넘긴 셈. “돈이 되는 작물 한두가지만 심고 자기 먹을 거는 다 사먹는 요즘의 시골살림으로는 이만큼 모으고 살기 쉽지 않을 거예요.” 군살없는 씀씀이는 기본이구나. ‘나를 위해서도 돈을 좀 써보자’ 큰맘 먹은 것이 고작 지난해, 찬물에 닿으면 손마디가 쑤시고 아픈지라 전기온수기를 들여놓은 것. 그토록 오래 욕망을 추스르고 알뜰살뜰 궁글려왔을 그이의 삶을 보면 소비에 휘둘리지 않는 삶과 농사짓는 삶이 맞물려 돌아가야 제자리를 잡을 수 있겠구나 싶다.
부부의 삶 자체는 이 시대 여느 농민들과 적잖이 달랐다. “돈 좀 벌어보자 이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죠.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유기농을 하면서 제대로 살자는 게 중심이었거든요.” 남편이 농민회다 정농회다 뛰어다니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묶어내 한울회를 만들어내는 일에 신명을 낸 것도 그런 꿈이 있어서였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기쁜 일임을 알기에 그이는 유기농을 하지 않는 이들도 담담하게 대한다. “너무 힘든 거 아니까. 나는 배운 대로 하더라도 이웃한테나 자식한테도 농약 치지 말라는 말이 안 떨어져요.”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을 수 있는지를 몸으로 겪어냈기에 자신에게는 엄격해도 남에게는 너그럽게 된 것이리라. 그래서 그런가. 비닐도, 기계도 형편껏 넘나들며 이용하는 편이다. 짚이나 낙엽으로 덮어주다가 일손이 모자라면 비닐을 씌우기도 하고 둘째 아들이 농사를 거드는 올해처럼 몸이 감당할 수 있을 때는 덜 쓰기도 한다. 오로지 땅심에 기대 농사지으려는 동생 세철(46)을 보는 누나의 눈길이 안타까움에 젖는 것도 그래서일 터. “돈이 좀 필요할 때는 퇴비도 좀 넣고 그랬으면 좋으련만. 저는 좋다고 하지만 일에 치여 사는 게 안쓰럽죠.” 정작 자신도 지난 10년 동안 퇴비를 “거의 안 쓰다시피” 해왔지만 외곬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는 천성이 드러난다.
그이는 농민으로서의 삶 못지않게 여성으로서의 삶도 곡진했다. 남편은 유기농을 보급하는 자리라면 마다하지 않고 나다녔다. 1990년대 중반부터 귀농학교다, 생협이다, 교육한다고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며칠, 몇달, 심지어 2002년에는 학교급식운동의 밑돌을 놓은 ‘백인백일 걷기’에 앞장서느라 일년을 손 놓다시피 했다. 밤낮없이 같이 일하던 그가 덜컥 손을 놓고 빠져버린 자리는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일이란 거 알죠.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란 것도. 하지만 사람 사는 게 그렇듯이 천천히 꾸준히 해나가야죠.” 이거다 싶으면 일을 확 벌이다가 끝마무리를 야무지게 못하기도 하는 남편에 대한 평가가 얄짤없다. 삶의 방향은 같더라도 그렇게 일을 풀어가는 스타일이 다르니 힘들어서 호적 정리까지도 생각해보았다. “난 거창하고 이상적인 거 별로 흥미 없어요. 마을에서 오순도순 살 수 있으면 되지요.” 관계 중심적으로 일을 풀어나가려는 부인과 이상을 좇고 근본을 놓지 않으려는 성향의 남편이 화성남자, 금성여자처럼 살고 있는 것이려니 하더라도 2인3각 경주와 같은 농사일인데 그가 오죽 숨막혔을까 싶다.
“여성들도 할 말을 다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여성이 챙기는 일이 같거나 더 많은데도 매사에 남성을 치켜세우는 세상을 꼬집는 말이다. “도리없이 남편 따라가는 게 운명이 아니지요. 일하다가도 교육에 나올 땐 나오고, 문화적인 것도 찾아 누리면서 스스로를 가꿀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들만 공부시키고, 딸들은 겨우 글이나 깨칠 정도로만 가르치던 세상. 울고불고해도 끝내 중학교를 못 가고 일을 잡아야 했던 소녀 시절, 세 남동생들 뒷바라지하는 것이 자기 앞가림인 줄 알았던 처녀 시절, 이 땅에 딸로 태어나 겪는 배제와 차별의 설움을 겪을 만큼 겪고도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 대등한 자리를 되찾은 여성 농민의 말이기에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정책적으로 딱 끊어주면 다 되는 일인데. 500~600평 정도만 다듬바시 일해도 먹고살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현실의 삶을 온몸으로 버텨내며 살아온 이의 에두르지 않은 통찰이, 농사를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 무엇인지 정곡을 찌른다.
변산/글·사진 이현숙 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
풀무농장 들어가 5년간 머물며
바른 삶, 바른 농사가 뭔지 깨우쳐
옳다고 해서 외곬 치닫는 건 경계
몸으로 감당 안될 땐 기계도 쓰고
농약도 화학비료도 남용이 문제
일도 하고 문화도 누리며 살았으면 1983년 겨울. 전북 변산으로 이사 가는 그들의 짐은 단출했다. 괭이·삽·호미 등 농기구, 씨앗, 소 한마리, 염소 한마리, 닭 세마리, 쌀 두가마니…. 달랑 이 살림 밑천으로 살아내야 했다. 남의 집, 남의 땅 빌려. 두살배기 아이를 등에 업고 온종일 일하기도 했다. 웬만한 농사일은 거뜬히 해내던 그였지만 한여름 뙤약볕에 비 오듯 하는 땀을 닦으며 속절없이 돋아나는 풀을 매는 일은 힘들었다. 비라도 내리면 푹푹 빠지다가 이내 딱딱하게 굳는 땅이라서 호미질을 도끼질하듯 해야 했다. 힘든 것은 고사하고 먹고살 길이 캄캄해 보여 ‘딱 한번만 농약을 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때도 있었다. 그런 유혹을 이기고 서너해 지나서야 남들만큼 수확할 수 있었다. 10년쯤 지나서야 땅 2000평도 사고, 남부럽지 않은 양옥집도 지을 수 있었다. 2000~3000평 농사로 누구나 이렇게 살아낼 수 있을까? 사시사철 어느 한구석의 땅도 놀리지 않고, 사이짓기, 돌려짓기, 섞어짓기 등 땅의 생명력을 끌어올리는 농사법으로 다품종 소량생산을 척척 꾸려낼 줄 아는 농사 달인쯤은 돼야 수만평 농사짓는 이들에게 맞먹는 벌이가 가능했을 터. “그냥 농사지어, 시중에 냈더라면 어림없었을 거요. 직거래를 터서 제값 받고 유기농산물을 낼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깔끔한 손맛으로 소문이 자자한 그이가 빵도 찌고, 양파나 고추장아찌 같은 절임 반찬류, 효소음료 등 먹거리를 만들어 곁들인 것이 소득에 적잖은 보탬이 됐다. 빚 없이 두 아들이 대학과 대학원을 마칠 수 있도록 뒷받침했고, 논도 4000평 정도 더 마련했으니 농사도 살림도 고비를 훌쩍 넘긴 셈. “돈이 되는 작물 한두가지만 심고 자기 먹을 거는 다 사먹는 요즘의 시골살림으로는 이만큼 모으고 살기 쉽지 않을 거예요.” 군살없는 씀씀이는 기본이구나. ‘나를 위해서도 돈을 좀 써보자’ 큰맘 먹은 것이 고작 지난해, 찬물에 닿으면 손마디가 쑤시고 아픈지라 전기온수기를 들여놓은 것. 그토록 오래 욕망을 추스르고 알뜰살뜰 궁글려왔을 그이의 삶을 보면 소비에 휘둘리지 않는 삶과 농사짓는 삶이 맞물려 돌아가야 제자리를 잡을 수 있겠구나 싶다.
전씨 가족의 소중한 먹거리를 담은 장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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