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윤의 논리에 압도된 시대
반복되는 재난과 단절하려면
공동으로 공동의 문제에 대해
공동체 이익 기준으로 생각해야
반복되는 재난과 단절하려면
공동으로 공동의 문제에 대해
공동체 이익 기준으로 생각해야
1953년 1월9일. 전남 여수항을 출발해 부산항으로 가던 여객선 창경호가 다대포 앞바다에 침몰했다. 선장·선원 등 6명만 살고 229명이 숨졌다. 20년 넘은 화물선을 개조해 여객용으로 운항해온 이 배에는 쌀이 200가마나 실려 있었지만, 구명벌·구명복은 하나도 없었다.
세월호 역시 무리한 선령 연장과 화물 과적, 안전 소홀이 참사의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61년전 창경호의 전철을 고스란히 되밟았다. 이 참사 앞에서 ‘후후발 근대화의 기적’으로 칭송받는 한국 현대사가, 실상은 저강도 재난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규모 참사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재난의 장기지속’에 다름 아니었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대재난은 폐허화된 사회 앞에 두 개의 갈림길을 열어 놓는다. 2008년 국내에 소개된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은 ‘재난 자본주의’라는 디스토피아에 관한 진술이다. 저자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폐허가 된 뉴올리언스에서 재난이 어떻게 새로운 이윤 창출을 위한 기회로 활용됐는지를 폭로한다. 반면 2012년 출간된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재난의 유토피아’를 다룬다. 솔닛에 따르면 재난은 처참하고 비극적이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싹트는 역사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책은 카트리나 재난 속에 피어난 시민적 자발성과 헌신, 연대와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재난을 겪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재난 자본주의’와 ‘재난 유토피아’의 에너지는 부단히 서로 대립한다. 그 사회의 진로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기업의 끝없는 이윤동기와 관료집단의 무책임을 자발적 시민들의 결속된 힘으로 얼마만큼 제어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현대사가 보여준, 이 악무한의 재난연쇄와 단절하기 위한 <한겨레>의 탐색은 결국 ‘공공성’이란 오래된 문제설정에 다시 도달했다.
세월호 참사를 돌아보며 ‘공공성’이란 화두를 떠올리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세월호의 취역에서 운항, 사고, 참사에 이르는 선택의 길목마다 무분별한 정책 변경, 불법 행위, 이기심, 책임 회피 등 타인과 공동체의 운명에 무감각한 결정과 조처들이 어김없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시장’과 ‘이윤’의 논리가 ‘사람’의 가치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공공성의 사전적 정의는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이다. 그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오르면 ‘인민이 모여 공적인 일, 공동체의 일을 함께 결정해나가는 과정’을 이르는 로마 시대의 용례와 만난다. 요컨대 ‘공동의 문제에 대해, 공동으로 참여해, 공동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절차·행위·윤리의 총체’가 공공성인 것이다. 공공성 옹호는 시장과 이윤의 논리로 전 사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에 맞서 사람을 중심에 놓는 것이며, 특정 집단이 아닌 전체 공동체의 이익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겨레>는 정부와 공공부문, 기업과 노동시장 등 한국 사회 곳곳에 산재한 공공성의 공백지대를 하나하나 짚어보고 그 대안을 모색해보려 한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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