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협업농장의 ‘인턴 농부’들이 다양한 빛깔의 쌈채소와 어우러져 꽃보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모자 쓰고 서 있는 맨 앞쪽의 정민철, 정씨와 같은 줄뒤쪽의 빨간 조끼 입은 조대성, 왼쪽 둘째 줄 맨 앞에 털썩 앉아 있는 유성환씨가 젊은협업농장을 이끄는 ‘세 남자’이다. 민택기 사진작가
[나는 농부다] 홍성 젊은협업농장
“왜 내려왔어. 차라리 노가다를 하지.” 귀농했다고 마을 어르신들한테 인사를 드리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귀농 초기에 어머니가 찾아와서 하신 말씀도 그랬다. “내 아들이 귀농이라니, 속상하다. 너의 선택이니 어쩌랴만, 이왕 시골에 내려왔다면 농공단지에라도 가서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지난해 1월 무렵이었다. 우리가 사는 충남 홍성의 홍동면에 아주 낯설고 생소한 환영 펼침막이 하나 내걸렸다. “경축, 농부 탄생!” 그 아래에는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아무나 이어갈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직업 - 농부’라는 가슴 뭉클한 글이 달려 있었다. 농사짓겠다고 자기 마을로 들어온 후배 조대성(36)씨를 환영하는 선배 귀농자(이환의·46)의 깜짝 이벤트였다.
그 한달 전쯤, 홍동면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환경농업전공부 교사이던 정민철(46)씨가 창업(풀무학교에서는 졸업을 창업이라 부른다)을 앞둔 제자들에게 자기고백을 했다. “좋은 농부가 되겠다고, 지난 2년 동안 이곳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땀 흘려 일했습니다. 하지만 창업을 앞둔 여러분에게 학교에서는 그저 빈집을 알아봐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순수한 농부의 열정을 살릴 수 있는 길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어렵지만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합니다. 뜻을 같이할 사람을 찾습니다.”
‘세 남자가 사랑한 쌈채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정씨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제자이던 조씨와 유성환(26)씨가 뜻을 같이했다. 홍동면에 인접한 장곡면의 땅을 빌렸다. 660여㎡ 하우스 한동의 소박한 ‘창업’이었지만, 꿈은 옹골차게 꾸었다. 젊은 귀농자들이 시골생활을 경험하고 독립할 수 있도록 인큐베이팅 역할을 하는 교육농장 형태를 구상했다. 안정적인 소득기반 확보를 위해 다양한 쌈채소에 도전했다.
‘세 남자의 쌈채소’는 올해 5월 ‘젊은협업농장’이라는 협동조합 법인으로 진화했다. 농장 확충과 운영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고 지속가능한 협업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협동조합 방식이 적절했다. 25명의 조합원을 모으고, 2천만원의 출자금을 확보했다. 그사이 농장 규모는 쌈채소 하우스 4동으로 불어났다. 추가로 짓고 있는 4동의 하우스도 8월 중순이면 완성된다. 세 젊은이가 감당하기에도 간단치 않은 규모로 커졌다. 이렇게 자리를 잡기까지, 마을의 한복판 땅을 선뜻 임대해준 도산리 임응철 이장의 배려가 큰 힘이 됐다.
젊은 귀농자들이
시골을 경험하고 독립해 나가도록
인큐베이팅하는
교육농장의 역할도 할 것이다
귀농자들의 초기 정착에
모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젊은협업농장에서 생산하는 쌈채소의 70~80%는 홍성지역의 생산지생협으로 납품한다. 나머지는 대부분 직거래여서, 서울 등지의 식당과 직판장으로 납품한다. ‘쌈아름’이란 브랜드를 개발해, 지역 농산물과 쌈채를 같이 넣어 매주 가정에 배달하는 꾸러미 사업에도 나섰다. 젊은협업농장에서는 전업농부인 ‘세 남자’ 말고도 대여섯명에서 열명 이상의 ‘인턴 농부’들이 늘 함께 일하고 있다. 농장을 열어 운영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귀농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초 풀무학교 전공부를 마친 곽제규(24)씨는 ‘세 남자의 농장’에서 본격적인 농부로 살아가는 길을 열어가고 있다. 농촌의 집이나 땅을 살 경제력이 없는 곽씨 같은 예비 농부에게는 딱 맞는 일터가 생겨난 셈이다. 대학생 때에 농촌봉사활동으로 홍성 지역과 인연을 맺었던 박창현(24)씨는 지난해 반년가량 이곳 농장에서 일했다. 군 입대를 한 뒤에도 휴가 때면 농장을 찾아 평생 농부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둘째아이 아토피 치료를 위해 귀농한 정영환(32)씨는 농장 일에 참여하면서 온전한 시골사람으로 스며들어가고 있다. 젊은 농부들의 협업농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농장에서 ‘50대 인턴’은 어르신 대접을 받는다. 도시에선 사진작가, 작곡가, 변호사, 디자이너, 시민단체 활동가들이었지만, 지금은 건강한 귀농과 농촌공동체의 삶을 꿈꾸는 동지로 더불어 일하고 있다. 같이 일하고 수입을 나누는 원칙도 세웠다. ‘세 남자’는 사업 첫해인 지난해 수입을 가져가지 못했다. 변변찮은 금액이었지만, 모두 재투자 재원으로 모으기로 했다. 사업 규모가 커진 올해부터는 세 사람을 포함해 1년 이상 ‘인턴 농부’ 과정을 거친 이들이면 누구나 똑같이(1/n) 수익금을 분배하기로 했다. 농장에서 종일 일하는 이들에게는 귀농지원금 등을 활용해 약간의 수당을 지급한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여러 사람이 모여 일하니 이래저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과 관계가 좋아야 즐겁고 오래 지속될 텐데, 일의 방식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누구 방식을 인정하느냐를 놓고 작은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쌈채소를 따는 단순한 작업이라 해도, 몸이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려면 6개월 이상이 걸린다. 새로운 사람이 수시로 드나드니, 작업 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새로 들어오는 이들의 능동적인 자발성을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을지, 극복해야 할 큰 숙제이다. “수개월에서 1년 정도의 인턴 농부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젊은이들이 협업농장 경험을 통해 시골을 알아가고, 무엇보다 농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대성씨는 “우리 농장에서 인턴 농부를 마친 이들이 몇명씩 뜻을 모아 또다른 협업농장을 세워 독립해 나가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양계를 하는 새로운 협업농장이 만들어지면, 쌈채소의 부산물을 양계장의 먹이로 보내고, 지금 농장에서는 쌈채소 농사에 쓸 거름을 양계장에서 얻는, 협업과 선순환의 확대재생산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상상만 하던 농촌과 농사를 현장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 이상의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처럼 막연한 이야기는 없다. 정민철씨는 “우리 농장은 귀농인들의 협업을 통해 이러한 고민을 같이 해결해보자는 시도”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우리 사례가 일반화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협업농장이 젊은 귀농자들의 초기 정착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젊은협업농장의 ‘세 남자’는 궁극적으로, 농사짓는 사람들이 생활의 여유로움을 갖고 마을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일에 나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젊은협업농장에서도 앞으로 식구가 더 불어나면, ‘인턴 농부’들이 농사짓는 시간을 지금보다 줄이고 마을 일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열어나갈 생각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시골이 지친 몸을 받아주고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골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나, 우리의 시골은 아직도 도시의 사람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젊은협업농장’은 마을의 공동체가 빛을 발하던 ‘오래된 미래’로 나아가는 작고 미숙한 도전이다. ‘젊음’과 ‘협업’에서 용기를 얻는다. 금창영 홍성 농부 <한겨레 인기기사>
■ 깜찍·발랄·시크…지금 역도계는 ‘소녀시대’
■ “4대강 보 관리비 1년에 6000억, 지금 철거하면 1600억”
■ ‘무노조’ 삼성중공업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 ‘섹스팅’ 뉴욕시장 후보 부인 힐러리 흉내내자 클린턴 부부 격분
■ [화보] 방화대교 공사현장 상판 붕괴…또 중국 동포들 희생
시골을 경험하고 독립해 나가도록
인큐베이팅하는
교육농장의 역할도 할 것이다
귀농자들의 초기 정착에
모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젊은협업농장에서 생산하는 쌈채소의 70~80%는 홍성지역의 생산지생협으로 납품한다. 나머지는 대부분 직거래여서, 서울 등지의 식당과 직판장으로 납품한다. ‘쌈아름’이란 브랜드를 개발해, 지역 농산물과 쌈채를 같이 넣어 매주 가정에 배달하는 꾸러미 사업에도 나섰다. 젊은협업농장에서는 전업농부인 ‘세 남자’ 말고도 대여섯명에서 열명 이상의 ‘인턴 농부’들이 늘 함께 일하고 있다. 농장을 열어 운영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귀농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초 풀무학교 전공부를 마친 곽제규(24)씨는 ‘세 남자의 농장’에서 본격적인 농부로 살아가는 길을 열어가고 있다. 농촌의 집이나 땅을 살 경제력이 없는 곽씨 같은 예비 농부에게는 딱 맞는 일터가 생겨난 셈이다. 대학생 때에 농촌봉사활동으로 홍성 지역과 인연을 맺었던 박창현(24)씨는 지난해 반년가량 이곳 농장에서 일했다. 군 입대를 한 뒤에도 휴가 때면 농장을 찾아 평생 농부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둘째아이 아토피 치료를 위해 귀농한 정영환(32)씨는 농장 일에 참여하면서 온전한 시골사람으로 스며들어가고 있다. 젊은 농부들의 협업농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농장에서 ‘50대 인턴’은 어르신 대접을 받는다. 도시에선 사진작가, 작곡가, 변호사, 디자이너, 시민단체 활동가들이었지만, 지금은 건강한 귀농과 농촌공동체의 삶을 꿈꾸는 동지로 더불어 일하고 있다. 같이 일하고 수입을 나누는 원칙도 세웠다. ‘세 남자’는 사업 첫해인 지난해 수입을 가져가지 못했다. 변변찮은 금액이었지만, 모두 재투자 재원으로 모으기로 했다. 사업 규모가 커진 올해부터는 세 사람을 포함해 1년 이상 ‘인턴 농부’ 과정을 거친 이들이면 누구나 똑같이(1/n) 수익금을 분배하기로 했다. 농장에서 종일 일하는 이들에게는 귀농지원금 등을 활용해 약간의 수당을 지급한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여러 사람이 모여 일하니 이래저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과 관계가 좋아야 즐겁고 오래 지속될 텐데, 일의 방식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누구 방식을 인정하느냐를 놓고 작은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쌈채소를 따는 단순한 작업이라 해도, 몸이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려면 6개월 이상이 걸린다. 새로운 사람이 수시로 드나드니, 작업 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새로 들어오는 이들의 능동적인 자발성을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을지, 극복해야 할 큰 숙제이다. “수개월에서 1년 정도의 인턴 농부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젊은이들이 협업농장 경험을 통해 시골을 알아가고, 무엇보다 농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대성씨는 “우리 농장에서 인턴 농부를 마친 이들이 몇명씩 뜻을 모아 또다른 협업농장을 세워 독립해 나가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양계를 하는 새로운 협업농장이 만들어지면, 쌈채소의 부산물을 양계장의 먹이로 보내고, 지금 농장에서는 쌈채소 농사에 쓸 거름을 양계장에서 얻는, 협업과 선순환의 확대재생산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상상만 하던 농촌과 농사를 현장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 이상의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처럼 막연한 이야기는 없다. 정민철씨는 “우리 농장은 귀농인들의 협업을 통해 이러한 고민을 같이 해결해보자는 시도”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우리 사례가 일반화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협업농장이 젊은 귀농자들의 초기 정착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젊은협업농장의 ‘세 남자’는 궁극적으로, 농사짓는 사람들이 생활의 여유로움을 갖고 마을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일에 나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젊은협업농장에서도 앞으로 식구가 더 불어나면, ‘인턴 농부’들이 농사짓는 시간을 지금보다 줄이고 마을 일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열어나갈 생각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시골이 지친 몸을 받아주고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골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나, 우리의 시골은 아직도 도시의 사람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젊은협업농장’은 마을의 공동체가 빛을 발하던 ‘오래된 미래’로 나아가는 작고 미숙한 도전이다. ‘젊음’과 ‘협업’에서 용기를 얻는다. 금창영 홍성 농부 <한겨레 인기기사>
■ 깜찍·발랄·시크…지금 역도계는 ‘소녀시대’
■ “4대강 보 관리비 1년에 6000억, 지금 철거하면 1600억”
■ ‘무노조’ 삼성중공업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 ‘섹스팅’ 뉴욕시장 후보 부인 힐러리 흉내내자 클린턴 부부 격분
■ [화보] 방화대교 공사현장 상판 붕괴…또 중국 동포들 희생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