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화사업 예산 줄어드는 등
‘중기네트워크’ 정부정책 미진
중기는 실패부담 커 협업 꺼려
클러스터 도입 10년째 ‘제자리’
주변 인프라 구축이 활성화 해법
중소기업 네트워크는 대기업에 기울어진 한국 경제의 차세대 혁신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정작 정부 정책은 미진하거나 오히려 후퇴하는 모습이다. 네트워크의 요람이 될 산업단지(클러스터)의 ‘인간 중심으로 전환’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산업화 시대, 재벌 대기업은 중소기업 하청 구조 기반의 싼 가격을 바탕으로 선진국 기업을 상대로 한 추격전을 벌여왔다. 하지만 선도해야 할 위치에 선 지금은 기존 방식을 뛰어넘을 새 동력이 필요로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승일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큰 기업 내에서 혁신을 이루는 것은 한계가 있다. 협력업체나 소비자 등 외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신사업을 일구는 ‘오픈 이노베이션’(열린 혁신)에 주목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몸집이 가벼운 중소기업들의 네트워크는 열린 혁신의 좋은 배양토가 될 수 있다.
국내 중소기업 관계는 주로 납품하는 대기업의 생산 공정을 따라 짜여 있지만, 다른 업종 간 교류를 목적으로 1994년 설립된 중소기업융합중앙회는 최근 활발히 주제와 회원을 늘리고 있다. 이는 이런 시대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 네트워크 관련 정부 정책은 기업 성장 단계별로 산재되어 있고, 총괄하는 컨트롤타워(지휘부)도 없는 실정이다. 대표적 기업 간 협력 촉진 사업인 중소기업진흥공단의 협동화사업은 최근 예산과 신청액이 계속 줄고 있다. 중진공의 실무담당자는 “정책 비중이 창업 쪽으로 기울면서 기성 기업에 대한 예산이 전체적으로 줄었다. 기업들도 바뀐 규모를 보고 신청을 줄였다”고 말했다. 협동화사업은 1979년 일본의 비슷한 사업을 본떠 들여온 것으로, 주로 제조기업들이 공동 공장부지 마련 용도로 활용해 왔다. 융합중앙회의 경우 교류는 활발하지만, 최근 3년 동안 실제 계약까지 간 신사업은 전무한 실정이다.
중기 간 협업이 미진한 이유는, 국내 중소기업의 자원이 부족하고, 실패의 대가가 크기 때문이다. 성보현 융합중앙회 사무처장은 “공동 사업은 단독기업이 경영권을 쥐었을 때보다 조절이 느슨해진다. 사례를 보면, 채무 등 의무가 발생했을 때 심한 균열과 함께 무너졌다. 그래서 기업인들이 비즈니스 단계에서 머뭇거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울타리가 될 산업단지(클러스터) 정책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선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기업 간 신뢰가 부족하다고 하는데 클러스터가 되어야 협력이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단순히 비슷한 기업끼리 모여있는 곳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산업단지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클러스터 정책 도입과 함께 산·학·연 연계 기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현재 국내 제조업 생산량의 62%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간 변화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다. 박동 한국직업능력개발원(개발원) 연구위원은 “지난 10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여전히 제자리”라고 말했다. 그는 참여정부에서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을 지냈다. 박 위원은 “산단 입주 기업들 문제의 핵심은 인력난이다. 젊은이가 일하고, 연구하러 가고 싶은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건물 리모델링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말
했다. 실제 개발원이 첨단화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구로디지털단지에 대해 2010년 조사한 주변 환경에 대한 만족도를 보면, 다른 산업단지 평균에 비해 오히려 더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큰 틀의 정책적 구상이 필요하다는 주문이 나온다. 김선빈 연구원은 “클러스터가 기업과 사람이 모일 토대가 되어야 하는데 가보면 살기가 어렵다. 미국의 경우 클러스터를 조성할 때 학교, 위락시설 등을 먼저 조성하듯이, 정부 역시 교육부와 국토교통부 등 부처간 협업을 통한 큰 그림을 먼저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동 위원은 “대학이 기업의 연구소 역할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클러스터마다 선도 대학이 필요한데, 이는 수도권 중심, 학벌 위주 사고와 연결된 문제”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보다 앞서 중소기업 클러스터를 활발하게 육성한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사례에서도 읽을 수 있는 교훈이다. 정부는 기업과 대학이 마주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주변 인프라를 갖추는 등 무대를 만드는 데 역점을 둔다. 이종건 코트라 밀라노 무역관장은 “이탈리아 정책에서 배울 점은 정부가 나서기보다는 기업들의 자발적 네트워킹이 되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협동형 산업단지, 재벌위주 개발 대신할 동력”
정태인 ‘새사연’ 원장
정태인(사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은 “중소기업과 대학, 시민사회가 연계한 협동형 클러스터 구축이야말로 재벌 위주의 개발주의 시대를 대신할 경제 발전 동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기조실장을 지냈고, 최근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를 두 차례 방문해 사회적 경제에 대해 연구했다. 인터뷰는 지난 4월 초 에밀리아로마냐 현지 취재를 전후해 서울 상수동 연구원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그동안의 경제발전과 지역산업 정책에 대한 평가는?
“정부 주도의 중앙집중형 경제 운용은 지역 개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많은 지역이 명품도시, 혁신도시 등의 이름으로 개발을 통해 기업을 유치하기 바쁜데, 각종 특혜만 부여할 뿐 고용 확대와 생산성 향상 등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는 상태다.”
-대안은 무엇인가?
“정보통신(IT), 생명공학(BT) 등 첨단기술을 앞세운 ‘한국의 실리콘밸리’ 건설에만 열중하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더 필요한 것은 ‘에밀리아로마냐형 클러스터’다. 다른 나라도 대부분 모방하다 실패한 실리콘밸리를 한국에서 지방에 여럿 건설하겠다는 발상은 비현실적이다.”
-에밀리아로마냐형 특징은?
“에밀리아로마냐는 좌파 중심의 역사를 배경으로 주민과 기업의 공동체 정신이 깊다. 이는 무수한 소기업들이 우글거리며 네트워크를 이루는 지역 클러스터에도 영향을 끼쳤다. 실리콘밸리가 ‘아이폰’이라는 제품이 상징하듯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근본적인 혁신을 이루는 방식이라면, 에밀리아로마냐는 다양한 중소기업들이 네트워크를 이뤄 구체적인 현장에서 응용적인 혁신을 이루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체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인 나라다.”
-그런 방식을 한국에 도입하기 위한 과제는?
“지금 한국의 클러스터는 네트워크가 미흡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전문 역량을 갖춘 지방대학과 시민사회의 연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박원순 시장의 사회투자기금 공약처럼 마을 단위의 지역공동체 기금 조성도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지난해 시행된 협동조합기본법을 발판으로 한 협동조합 활성화도 지역 네트워크 기반 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명심할 것은 서로 간의 신뢰를 허물어뜨리지 않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구체적인 정책이 나오지 않아서 평가하기 어렵지만, 창조경제 개념에는 분명히 벤처기업 활성화가 들어 있다. 역시 실리콘밸리형을 꿈꾸는 거 같다. 하지만 (벤처 출신) 안철수 의원도 ‘삼성동물원’ 등으로 지적했듯이, 실리콘밸리형을 만들더라도 재벌로부터 자유로운, 숨 쉴 공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권오성 기자
“중기 협업 키우는데 교육·중심기업 역할 중요”
보아리 볼로냐대학 교수
크리스티나 보아리(사진) 볼로냐 대학 교수(경영학)는 중소기업 간 협업을 키우기 위한 핵심 요소로 “교육과 중심 기업(focal firm)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탈리아 북부 클러스터 정책 전문가로, 세계은행 의뢰로 동아시아에서 중소기업의 역할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인터뷰는 1088년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인 볼로냐 대학의 연구실에서 4월3일 진행됐다.
보아리 교수는 “전통적으로 이 지역 클러스터는 정부가 원해서가 아니라 자생적으로 생겨났는데, 그 중심에는 직업학교가 있었다”고 말했다. 예컨대 에밀리아로마냐 주도인 볼로냐의 경우 포장기계 등 전자기계 산업이 발전하게 된 큰 동력 가운데 하나로 기술학교 ‘알디니’가 꼽힌다. 1844년 설립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 기술학교는 기술 인력과 관계를 클러스터에 꾸준히 공급했다.
동시에 ‘앵커(중심축)’가 될 수 있는 기업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보아리 교수는 “단순히 소기업들이 모여선 네트워크 효과가 나타나기 어렵다. 중간에 일정 규모를 갖추고 기업 간 역할을 조정하는 기업(코디네이터)들이 클러스터 구축에 중요한 요소인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보아리 교수는 한국에 에밀리아로마냐형 클러스터 도입에 대해선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볼로냐 역시 공공기관에서 영상기기 산업을 직접 개입해서 만들려 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또 클러스터는 해당 산업이 위기에 빠지면 해당 기업들 간의 조정(철수·축소 등)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토요타 방식의 하청시스템도 강점이 많기 때문에 둘 가운데 상황에 맞게 운용하는 게 좋다.”
볼로냐/권오성 기자
<한겨레 인기기사>
■ 일베, ‘5·18 왜곡 신고센터’에서까지 ‘막말 일탈’
■ MB, ‘노무현 4주기’에 1박2일 골프…논란 확산
■ 여자들이 남친에게 가장 짜증날 때 1위는?
■ 이천수 1464일 만에 골 넣자마자…
■ 검찰, 곧 원세훈 재소환 가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