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위의 완성차업체인 폭스바겐, 세계 3위의 소매업체인 메트로, 역시 독일을 대표하는 완성차업체인 베엠베(BMW). 독일 가족소유기업 리스트 중에서 상위 1~3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들이다. 이처럼 독일은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에서도 가족소유기업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들 가족소유 대기업 중에는 히든 챔피언(강소 기업) 출신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독일 가족소유기업 6위인 세계적인 자동차 부품회사인 보슈가 대표적이다. 기계·자동차·섬유·건설·통신 등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며 지난해 60억 유로(한화 8조7000억원)이 매출액을 기록한 프로이덴버그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1992년 처음 히든 챔피언이라는 용어를 선보였을 때부터 리스트에 포함됐던 이 회사는 현재 창업자의 7~8세대가 대주주다. 히든 챔피언 전문가인 만하임응용과학대학의 빈프리트 베버 교수는 “프로이덴버그는 지난 20년간 대단히 빠른 속도로 성장해 대기업 반열에 올라섰지만, 기업문화는 여전히 히든 챔피언들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푹스오일은 경기침체와 자동화에도 불구하고 직원을 해고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푹스오일 공장 내부 모습. 푹스오일 제공
“기업이 창업자 가족보다 더 중요”
윤활유 전문 생산업체로 히든 챔피언인 푹스오일(이하 푹스)도 가족경영기업이다. 상장기업이지만 푹스가문이 51%의 주식(보통주 기준)을 보유하고 있다. 창업자인 루돌프 푹스의 손자인 슈테판 푹스(44)가 지난 2004년부터 9년째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다. 독일 중소기업연구소(IFM)의 미하엘 홀츠 연구원은 “독일 중소기업의 3분의 1은 푹스처럼 가족이 소유와 경영을 함께 하는 기업들”이라고 말했다.
독일 히든 챔피언의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는 가족소유를 바탕으로 한 경영 리더십의 지속성이 꼽힌다. 푹스의 창업자는 31년간, 아들인 만프레트 푹스 2대 회장은 41년간 각각 최고경영자를 맡았다. 창업자 가족이 아닌 전문경영인 출신도 마찬가지다. 히든 챔피언의 전문경영인 출신 최고경영자들은 소유-경영 분리에 기반한 창업자 가문과의 돈독한 파트너쉽을 바탕으로 평균 재임기간이 20년을 넘는다.
오너 경영(가족소유경영)은 한국 재벌의 성공 요인으로도 꼽힌다. 오너 경영은 창업자들의 뛰어난 기업가정신과 경영 리더십의 지속성을 바탕으로 단기 경영실적이 아닌 장기적 관점에 의한 사업전략 추진을 가능케하기 때문이다. 푹스의 게오르크 링크 이사는 “최고경영자가 불과 몇 년만에 그만두는 기업은 단기실적에 급급해 장기적 사업전략을 추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푹스는 2대 회장 재임기간 41년 동안 전례없는 고속성장을 이뤘다. 회사 매출은 1700만 유로에서 10억 유로로, 60배 가까이 커졌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지난해 취임 25년을 맞았다. 이 기간 동안 삼성의 매출은 17조원에서 273조원으로 15배 늘어났다. 일부 한국 언론들은 이를 ‘이건희 신화’라고 높이 평가했는데, 히든 챔피언인 푹스의 성장세는 삼성보다 더욱 뛰어난 셈이다. 역시 가족소유에 기반한 히든챔피언인 강철선가공설비 제조업체 바피오스의 바이크만 최고기술책임자도 “단기적인 이윤 증대보다 장기적으로 기업을 유지,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장자승계 원칙은 없다…능력 중심
가족소유경영은 장점과 함께 단점도 안고 있다. 흔히 “경영능력이라는 유전자는 없다”는 말이 있지만, 가족소유경영기업이 능력 없는 후계자에게 승계되면 회사는 얼마 못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다. 한국 경제는 경영능력의 검증이 안된 2~3세들이 승계한 재벌들이 외환위기 전후로 잇달아 몰락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수십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진 성공한 히든 챔피언들은 공통적으로 합리적 승계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일례로 푹스의 승계 원칙은 “(가족경영의) 후계자는 합당한 자질과 의지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승계자는 경영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에 대한 충분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푹스의 3대 회장인 슈테판 푹스는 35살 때인 2004년에 최고경영자에 취임하기 전에 다른 회사에서 3년, 푹스에서 7년 등 모두 10년간의 경영능력 검증기간을 거쳤다. 부친인 만프레트 푹스 전 회장은 “후계자는 기업가로서의 잠재력, 경영능력, 조직과 구성원에 동기를 부여하고 통합하는 능력, 호기심, 외국어 능력, 국제감각 등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게오르크 링크 이사는 “현재의 슈테판 푹스 회장이 최고경영자가 된 것은 창업자의 손자여서가 아니라 경영역량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능력을 우선시하는 만큼 독일의 히든 챔피언은 한국 재벌과 같은 ‘장자 승계 원칙’이 없다. 푹스의 게오르크 링크 이사는 “창업자 후손이라고 모두 경영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고 귀띔한다. 창업자 후손들이 여러명 경영에 참여하면 독단과 전횡의 위험성이 커지고, 자칫 경영혼선이 빚어질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푹스가문의 법규는 이사회와 감사회에 오직 1명씩만 참여할 수 있도록 정해놓았다. 실제 푹스의 이사회 멤버 5명 중에서 4명이 전문경영인이다. 만프레트 푹스 전 회장은 “회사의 기본원칙 중 하나는 창업자 가문 출신 이사와 전문경영인 출신 이사를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창업자 가문 출신이라고 해서 어떤 종류의 우대도 없다”고 강조했다.
CEO 선임에 노조참여 보장
히든 챔피언의 최고경영자는 감사회에서 선임된다. 독일 기업은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 외에 감사회를 별도로 두고 있다. 히든 챔피언의 창업자 가족들은 감사회 멤버로 활동하는 사례가 많다. 일례로 푹스의 만프레트 푹스 전 회장은 현재 감사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하지만 감사회가 창업자 가족들을 위한 단순한 거수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법은 노조 대표의 감사회 참여를 보장하고 있다. 또 창업자 가족과 노조 대표 이외의 다른 감사회 멤버들은 독립적인 외부인사들이다. 푹스의 경우 세계적 화학기업인 바스프 출신 인사가 감사회 회장을 맡고 있다.
창업자 가족 안에서 적당한 후계자를 찾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할까? 독일 중소기업연구소의 미하엘 홀츠 연구원은 “가족소유경영은 후계자 문제가 최대 약점이다. 경영능력을 갖추고, 경영에 관심이 있는 창업자 후손이 없을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1970년대 이후 히든 챔피언들에게 이런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콘크리트용 펌프제작업체로 히든 챔피언의 하나인 푸츠마이스터는 지난해 중국에 매각됐다. 창업자 자손 중에서 적당한 승계자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계자 선정을 둘러싸고 창업자 가족 안에서 불화가 생길 경우는 더욱 치명적이다. 한국 재벌도 경영권을 둘러싸고 형제 또는 가족 간 불화로 경영위기를 자초한 사례가 적지 않다. 한국 속담에 “부자가 3대 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독일에도 ‘할아버지가 큰 부를 일구고, 아버지가 이를 지키지만, 손자가 다 날린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오너후손 상속위한 기업분할 안해
“기업이 창업자 가족보다 더 중요하다.”
가족소유경영을 하는 독일 히든 챔피언들의 대원칙이다. 히든 챔피언의 합리적 승계나, 전문경영인과의 파트너십이 가능한 것도 이런 원칙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푹스의 만프레트 푹스 전 회장은 평소 “회사의 이익은 오너가문의 이익에 우선한다”는 말을 강조한다. 푹스 가문은 이를 집안의 법규로 명시하고 있다.
독일 히든 챔피언들이 가족소유라고 해도 한국 재벌과 달리 오너 형제간 또는 자식들 간에 계열분리를 안하는 것도 이런 대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베버 교수는 “독일 기업의 경우 창업자 후손들의 상속을 위해 기업을 분할하는 사례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경영상 필요가 없는데도 단지 후손들의 상속을 위해 기업을 쪼개는 것은 기업 경쟁력을 훼손하는 행위로 사실상 배임에 해당한다는 인식이 확고한 것이다. 독일 히든 챔피언의 경우 계열분리가 없는 것은 특정 분야에 집중하고 있는 사업구조의 영향도 있다. 하지만 여러 사업을 영위하는 대기업들의 경우도 단지 상속을 위해 계열분리를 하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역시 창업자 가족보다 기업을 우선시하는 원칙 때문이다.
베버 교수는 “이론적으로는 창업자 가문이 회사 주식을 100% 갖고 있다면 계열분리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그런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한국 재벌의 경우 총수일가의 평균 지분이 4%에 불과한데도, 관행적으로 2·3세들을 위해 계열분리를 하는 것은 독일 히든 챔피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가족소유경영을 하는 독일 히든 챔피언의 경우 최고경영자가 죽기 전에 미리 미리 후손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도 한국재벌과 대비된다. 만프레트 푹스 전 회장은 9년 전인 65살 때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후 회사의 감사회 부회장을 맡으며, 아들의 경영 후견인이자 회사의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의 재벌은 봉건왕조처럼 총수가 죽어야 경영권이 승계되는 게 일반적이다.
사후상속 아닌 사전 승계
독일의 히든 챔피언의 상당수가 창업한지 수 세대가 지났음에도 가족소유기업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기업상속에 대한 세금공제율이 85~100%에 달해, 사실상 세금을 거의 안내기 때문이다. 또 중소·중견기업에만 적용되는 한국의 가업상속지원제도와 달리 독일은 대기업에게도 똑같이 혜택이 주어진다. 한국이라면 기업주에 대한 엄청난 특혜로 비쳐질 수 있는 일이 독일에서 가능한 것은 역시 “기업이 창업자 가족보다 더 중요하다”는 원칙의 영향이다.
독일에서는 개인이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기업 자체는 그 속에서 일하는 수많은 종업원, 거래업체, 소비자, 나아가 지역사회를 위한 사회적 공기(公器)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베버 교수는 “독일 정부는 가족소유기업에 우호적인 세금체계를 운용하고 있는데, 이는 기업주에게 특혜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기인 기업이 장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일 만하임·슈투트가르트/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3세대 이상 넘어가면 전문경영인에 맡겨
히든챔피언의 가족소유경영 변천과정후계자 합의 어려우면 외부영입
독일 히든 챔피언 전문가인 만하임응용과학대학의 빈프리트 베버 교수는 히든 챔피언의 가족소유경영 변천 과정을 3단계로 설명한다. 1단계는 창업단계로 가족이 소유와 경영을 함께 한다. 2단계는 가족소유경영과 전문경영인체제가 혼합된 형태다. 3단계는 가족은 소유만 하고,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소유-경영 분리 형태다. 베버 교수는 “가족소유경영기업도 창업 이후 3~4세대로 접어들면 소유-경영 분리를 통해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 5세대가 넘어서면 가족경영을 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일부 독일 기업의 경우, 소유-경영을 분리했다가 다시 가족경영으로 복귀하는 예외적인 사례도 있다. 폴크스바겐의 경우 창업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셰의 외손자인 페라디난트 피에히가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복귀한 바 있다. (피에이는 현재 감사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도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2009년 창업자의 손자인 도요다 아키오가 사장으로 취임했다.
가족경영의 전통을 이어가는 푹스오일의 만프레드 푹스 전 회장(앞)과 슈테판 푹스 회장. 푹스오일 제공
강철선가공설비 생산업체인 바피오스는 독일 히든 챔피언의 가족소유경영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바피오스는 120년 전 세 가문이 힘을 합쳐 공동으로 창업했다. 현재 창업자의 3~4세대 후손들이 회사 주식의 100%를 나눠갖고 있다. 바피오스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세 창업 가문에서 돌아가며 최고경영자를 맡았다. 하지만 2002년 창업자 가족들은 더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주주로서의 역할만 하는 소유-경영 분리를 단행했다. 창업자 가족이 많아지면서 후계자 선정 합의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바피오스 관계자는 “세 창업자 가문의 구성원이 35명으로 늘어나면서, 최고경영자 선정 등 이해관계 조정이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바피오스의 창업자 가족들은 이후 큰 틀에서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감사회 구성원으로만 참여하고,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있다.
독일 히든 챔피언들은 대체로 창업 이후 3세대 이상으로 넘어가면 가족 수가 많아져 후계자 선정 합의가 어려워진다. 특히 바피오스처럼 창업자가 여럿일 경우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 푹스오일의 만프레트 푹스 전 회장은 “그런 경우 후계자를 외부에서 영입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곽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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