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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싱크탱크 광장] “오락가락 재벌개혁, ‘기업집단법’ 제정이 대안이다”

등록 2012-04-10 19:58수정 2012-04-10 21:35

‘재벌횡포 규제’ 새 접근법 논쟁
기획 :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재벌기업이 골목상권 생태계까지 무분별하게 진출하면서 재벌개혁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몇년 전부터 재벌을 규제하는 독립적인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이른바 ‘기업집단법’ 제정을 둘러싼 논쟁이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소장 이창곤)는 사실상 규제 공백상태에 있는 재벌을 규율하는 제도적 틀로서 기업집단법 제정이 왜 필요하며, 어떤 내용을 법에 담을 것인지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기업집단법 제정을 앞장서 주창해온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 소장, 그리고 이와 접근 방식을 조금 달리하면서 독자적인 기업집단법의 틀을 구상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김병권 부원장의 글을 함께 싣는다. 기업집단법은 재벌개혁의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 회사법에는
지배주주 등 정리안돼
정권따라 일관성 잃고
관치 유혹 빠지게 돼

재벌은 기업집단(group of companies)이다. 즉 법적으로는 독립성을 가진 다수의 기업이 경제적으로는 마치 하나의 기업처럼 움직인다. 비단 재벌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중견·중소기업도 기업집단의 조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다. 기업집단이 경제활동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현대자본주의의 가장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그러면 기업집단에 대한 규율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자연인이 아닌 기업이 다른 기업의 주주가 되는 것을 합법화함으로써 모-자회사 관계의 기업집단이 형성된 것은 1890년대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기업집단은 이제 100년이 조금 넘은 새로운 현상이며, 이에 대한 규율 체계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나라마다 다르다.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독일의 콘체른법과 같이, 성문법에 의해 기업집단 자체를 법적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모회사가 자회사에 대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그 소액주주·채권자·노동자 등과의 내적 균형이 무너지는 상황(situation)이 만들어졌다고 판단되면, ‘자동적’으로 이들 이해관계자의 권익을 보호할 책임을 모회사에 부과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영국·미국 등의 관습법 국가들이 채택하는 방식으로, 원칙적으로는 그룹의 관계사들을 모두 독립된 법인으로 취급한다. 다만 모회사의 구체적 행위(conduct)가 사회 통념상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은 경우에는 판례법상의 원리를 통해 ‘예외적’으로 개입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방식은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많은 나라가 각각의 특수한 사정에 맞게 이 두 가지 접근방식을 절충한 법률 체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것이 세계적 흐름이다. 독일 방식은 사전적으로는 너무 경직적이고 사후적으로는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는 반면, 영국·미국 방식에는 예외적 구제수단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광범위한 사각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회사법(상법)에는 지배, 지배주주, 기업집단 등의 기초 개념조차 정의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성문법의 공백을 메우는 법원의 판례가 잘 구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공정거래법 등의 행정적 수단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고, 그것으로도 여의치 않을 때는 검찰·국세청 등을 동원하여 커튼 뒤에서 팔을 비트는 관치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재벌개혁 노력이 일관성을 상실한 채 정치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가칭) ‘기업집단법’ 제정을 재벌개혁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제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의 콘체른법과 같은 단일 법률을 지금 당장 입법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업집단의 생성·유지·소멸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쳐 ‘그룹 경영의 편익 인정’과 ‘이해관계자의 권익 보호’라는 두 목적을 조화시키는 핵심 요소들을 확인하고, 이를 상법·공정거래법·파산법·금융법·노동법 등의 다양한 법 영역에 체계적으로 도입하자는 거다. 즉 많은 나라에서 확인되고 있는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접근방법을 제안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룹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허용되는 조건과 절차가 명확히 규정되어야 한다. 그 전제 아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권익 보호 장치를 구축한다. 예컨대, 소액주주에게는 그룹 계열사로 편입될 때 떠날 수 있는 권리, 즉 모회사에 주식의 매입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채권자 보호를 위해서는 부도에 근접한 상황에서 유한책임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조건을 분명히 정해야 한다. 노동자에게는, 소속 회사 및 고용 형태에 관계없이, 그룹 전체의 전략적 판단에 대한 정보권과 협의권을 부여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실체로서 존재하는 기업집단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또는 이에 대한 규율 체계를 공백으로 남겨둔 상태에서 재벌개혁 노력이 성공할 수는 없다. 기업집단법 제정은 재계와 사회 전체 사이의 합의 내용을 재작성하는 과정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재벌 개편’ 법적 틀 제시
권한과 책임 명문화해야
독과점 규제 가능케 되고
주주·노동자 권리도 보장

막상 총선에서는 주요 쟁점이 되지 못하고 누그러졌지만 재벌개혁이 절박하다는 문제의식은 정치권이나 학계, 시민사회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넓은 공감대가 있다. 그러나 지금 어떤 개혁이 필요하고 어떤 개혁 수단이 동원되어야 하는지는 백인백색이다. 2009년에 폐지된 출자총액 제한제도를 부활하자는 의견에서부터 순환출자 금지 같은 새로운 사전규제 장치를 동원하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재벌과 총수일가의 범법행위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일감 몰아주기를 금지하고 편법 증여를 막는 것이 긴요하다는 주장과 원-하청 불공정 거래가 가장 시급하다는 의견까지 다양하다.

조금 호흡을 길게 하고 역사적 맥락에서 재벌개혁 논쟁을 파악해 보자. 1986년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구축되었던 출자총액제한제도와 큰 틀의 재벌규제 체제는 외환위기 이후 지난 15년 동안 점차 약화되고 대신 시장 자율이나 자본시장을 통한 견제에 맡겨지는 방향으로 변해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시장의 자율적 조정능력이나 자본시장에서의 소수 주주권 강화 방식만으로는 재벌 집단이 적절히 견제되지 못했다. 오히려 재벌의 경제력 집중 정도가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지금은 재벌의 독점적 횡포와 경제력 집중을 억제할 마땅한 사회적·제도적 장치가 없는 규율의 공백상태에 있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마저 친기업정책을 내걸면서 지난 4년 동안 유통 재벌은 골목상권을 휩쓸고, 석유·통신재벌은 독과점 가격을 밀어붙였다. 전자와 자동차 재벌은 하청단가를 깎아 거대한 수익을 달성하는 등 국민경제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포식자로 커져버렸다. 외환위기 이후 15년 만에 재벌개혁이 새롭게 국민적 의제로 부상한 배경이다.

지금은 한두 가지 수단으로 재벌의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적어도 앞으로 10년 한국 경제를 내다보면서 규제 공백상태에 있는 재벌을 어떤 제도적 틀로 규율해나갈 것인지 고려해야 한다. 학계 등에서 그동안 간간이 나왔던 ‘기업집단법’ 제정 주장은 이미 한국 경제의 중심에 착근되어 버린 재벌체제를 공식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성문법적 틀 안에서 규제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어 현재의 시점에서 적합한 대안일 수 있다.

기업집단법은 개별 기업 범위를 넘는 기업집단이 독립적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실체’라는 점을 상법 차원에서 인정하고, 그 존재와 구성 요건을 법률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현실적 실체이면서도 법적 규정이 없었던 기업집단과 기업집단을 이루고 있는 계열 회사들 사이의 지분관계는 물론 통제 권한과 책임 범위, 구조조정본부 같은 기업집단 전체의 지휘통제 구조를 법적으로 명문화해야 한다. 나아가 전체 기업집단과 소속 기업 사이의 이해 상충 관계를 규율하며, 이른바 내부 거래 허용범위 등도 규정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합의한 재벌체제의 구조 개편 방향을 법적 틀로 제시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재벌과 관련해 제기돼온 여러 쟁점이 정리되어 기업집단법에 종합적으로 반영되어야 하므로 경제학계와 법학계의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고 현실 경제여건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더 이상 규제의 공백상태를 방치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의 시급성도 있다. 출총제를 부활시켜서라도 재벌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재벌의 횡포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공정거래법에, 기업집단법에 포함될 주요 맥락들이 있는 상황이고 추가적으로 어떤 규율이 필요한지도 알려져 있다. 의지만 있다면 19대 국회가 구성되면 곧바로 논의에 들어가고 법률 제정을 서두를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확인해둘 것은 기업집단법이 어떤 측면에서는 재벌 인정법이지 반재벌법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재벌 규제법과 동시에 공정거래법의 전면 재개정이 같은 무게로 다뤄져야 한다. 독일은 주식회사법에 콘체른 규정을 삽입했던 1965년 이전(1958년)에 경쟁제한방지법(GWB)을 제정하여 독과점 규제를 하고 있다. 나아가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보편화시킨 1976년의 공동결정법이 기업집단에 대한 노동자의 견제 수단으로 존재한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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