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에서 바라본 샹드마르스 광장. 원래 왕립사관학교 연병장이었던 이 광장은 프랑스 혁명기에는 전국연맹제 등 국민 화합의 장으로 사용됐으나, 때로는 시민 학살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벽이 없는 길거리에서 공권력의 폭력성이나 광기를 의식하고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면 그곳은 감옥과 다름없는 공포의 밀실이다. 우리는 하나도 떳떳할 것이 없는 공권력이 국민을 강제로 착하게 만들고, 길거리까지 닫힌 공간으로 만들던 시절을 겪었다. 그러나 시민이 군사독재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고 자기주장을 관철하면서 광장을 열었다. 역사적으로 광장은 민주화의 산물이고 척도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1년 뒤인 1790년 7월14일에 샹드마르스(Champ de Mars) 광장에서는 새 나라의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전국연맹제가 열렸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왕이 파리 주민을 겁박하기 위해 가장 용감하고 말을 잘 듣는 외국인 부대들을 주둔시켰던 곳이었으니 혁명을 실감할 수 있었다. 행사장을 준비하는 과정은 힘겨웠지만 공사판에서 일하거나 행사 당일에 참관한 사람들에게 보람차고 자랑스러운 경험이었다.
전국연맹제를 위해 왕립사관학교부터 샹드마르스의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와 하수구를 점검하여 지하의 구조를 파악한 뒤 거의 2만8천㎡의 땅을 몇 미터씩 파고 진흙을 퍼낸 뒤 물이 잘 빠지는 흙을 넣고 다지는 공사를 해야만 개선문·관중석·조국의 제단을 안전하게 세울 수 있었다. 목수, 석공, 미장이, 허드렛일꾼 등 15만명이 제때에 급료를 받지도 못한 채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했다. 행사 며칠 전인 7월6일 라트리니테
국민방위군 소속 카르트리는 <크로니크 드 파리> 신문에 글을 썼다. 그는 전국연맹제 행사장 준비를 제때에 맞추려면 파리 국민방위군 부대마다 10명씩 뽑아 샹드마르스 작업장으로 보내라고 호소했다.
프랑스 혁명 1주년을 기념해 1790년 7월14일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열린 전국연맹제의 모습. 비질에 있는 프랑스혁명박물관 소장 그림. 위키피디아
피에르앙투안 드마시가 그린 ‘최고 존재 제전’(신을 위한 축제)의 모습. 이 축제는 로베스피에르가 1794년 국민화합을 위해 샹드마르스에서 개최했다. 위키피디아
이튿날 새벽부터 남녀노소가 샹드마르스 현장에 몰려들었다.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활발히 움직였다. 여기는 석탄 장수, 저기는 가발 장수, 중앙시장 노동자, 물장수, 행상인들이 모두 부지런히 움직였다. 심지어 상이군인들도 여전히 팔을 놀릴 수 있고 정신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잘 차려입은 여성들도 손수레에 매달렸다. 비록 무임금이지만 그들은 흥겹게 ‘아, 잘될 거야’(Ça ira, 사 이라) 노래를 부르면서 일했고, 그 덕에 전국연맹제 준비를 무사히 마쳤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선한 목적을 위한 행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성장하고 발전하는 나무다. 1790년 7월14일 정오에 전국에서 일제히 하나의 국가와 헌법에 충성하는 맹세를 했다. 전국연맹제의 중심인 샹드마르스의 행사는 오후 늦게 시작했다. 바스티유 광장에서 출발한 참가자들이 모두 식장에 입장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샹드마르스가 혁명기에 모든 행사의 중심이 되기까지 프랑스에서 광장의 탄생과 민주화 과정을 살펴보자. 앙리 4세는 1605년부터 투르넬 저택의 자리에 정사각형으로 플라스 루아얄(왕립 광장)을 조성하고, 1607년부터 어린 세자(장차 루이 13세)를 위해 시테섬 서쪽에는 세모꼴로 도팽 광장을 조성했다. 루이 14세 치세에 그의 기마상을 세운 이 원형 광장은 혁명기에 ‘승리의 광장’을 뜻하는 플라스 데빅투아르가 되었고, 앙리 4세가 조성한 플라스 루아얄은 혁명기에 보주 광장이 되었다. 그 밖에 교회와 관련한 광장도 있었다. 광장은 처음부터 군주나 종교의 권력을 기리는 장소였다가 혁명기부터 시민의 자유·평등·우애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바스티유 광장은 감옥으로 더 유명한 바스티유 요새를 헐고 조성했으며, 콩코르드 광장은 루이 15세 광장에서 루이 15세 기마상을 철거하고 단두대를 세운 혁명 광장으로 부르다가 화합을 꾀하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샹드마르스 광장은 왕립사관학교인 에콜 루아얄 밀리테르에 속한 군사훈련장이었다가 혁명기에 중요 행사장이 되었다.
샹드마르스의 역사는 길다. 고대 아테네에는 아레오파고스(Areopagos,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가 있었다. 이 언덕은 파르테논 신전을 세운 아크로폴리스와 시민들이 교류하던 아고라 사이의 돌산이다. 이 언덕에서 고대 아테네의 전사인 귀족들이 회의를 열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거기서 기독교를 전도했다. 고대 로마인은 로마시 바깥 벌판에 전쟁의 신 마르스의 제단을 세우고 ‘마르스의 벌판’(Campus Martius)이라 불렀다. 나중에 제단 주위에 나무 층계석을 갖춘 원형경기장을 지었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장군이 최초로 석조 원형경기장을 지었다.
5세기 말에 프랑스 왕국을 세운 프랑크족은 3월이 오면 벌판에서 회의를 열었다. 자유민인 전사들만 참여하는 이 회의를 ‘샹드마르스’(3월의 벌판회의)라 불렀다. 8세기 중엽부터는 농작물을 보호하려고 5월에 모였다. 샹드마르스가 샹드메(Champ de Mai, 5월의 벌판회의)로 바뀌었으나, 반드시 5월에만 모일 필요는 없었고, 6월이나 7월에 모이기도 했다. 왕국이 영토를 넓히고 국가체제를 갖추면서 왕을 중심으로 조정이 복잡한 회의체로 분화한 결과 샹드마르스나 샹드메가 사라졌다.
에펠탑이 건축되기 전인 1878년의 파리 국제박람회 모습. 위키피디아
1900년에 개최된 파리 국제박람회의 모습으로 1889년에 완공된 에펠탑이 센강가에 서 있다. 위키피디아
1751년 1월에 루이 15세는 왕립사관학교(에콜 루아얄 밀리테르)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파리의 명사들(세 신분의 대표급 유명인들)이 1626년부터 왕에게 간청했던 사관학교 건립을 루이 15세에게 부추긴 사람은 전쟁대신 다르장송 백작이 아니라 애첩인 마담 드 퐁파두르와 재정가 파리 뒤베르네(Joseph Pâris Duverney)였다. 4대 이상의 귀족 혈통을 증명하는 8~11살의 가난하거나 고아인 사내아이로 읽고 쓸 수 있어야 입학할 수 있었다. 모두 500명을 뽑아 4년간 교육한 뒤 소위나 기병대 기수로 임관시킬 계획이었다.
왕립사관학교를 지을 터는 1671년에 앵발리드(
앵발리드 편 참조)를 지은 그르넬 벌판의 서쪽에 붙은 땅이었다. 루이 14세가 앵발리드를 짓고, 증손자 루이 15세는 그 곁에 사관학교를 지음으로써 군주는 언제나 파리의 발전을 바란다는 뜻을 표현했다. 더욱이 센강 북쪽보다 덜 개발된 지역에 국책사업을 시행한 결과 인근 주민들에게도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도시를 확장할 수 있었다.
왕립사관학교 터는 16세기까지 포도밭이었다가 차츰 파리 주민들에게 채소를 공급하는 밭으로 바뀌었다. 1751년에 건축가 앙주 자크 가브리엘은 거기 있는 그르넬 성관(군주나 제후, 귀족의 거성이나 별장)과 농장을 사들여 공사를 시작했다. 파리 주재 한국대사관은 앵발리드와 가깝지만 그르넬 길 125번지이며, 바렌 길의 로댕 미술관 곁이다.
왕립사관학교를 짓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748년에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끝낸 직후라서 복권과 카드 판매 수익으로 건축비를 마련하려던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게다가 1754년부터 아메리카에서 영국과 마찰을 빚다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7년전쟁에 휩쓸렸고, 그 뒤에도 공사를 질질 끌면서 정원을 채우지 못한 채 건물을 조금씩 갖추는 대로 개교했다가 루이 16세가 등극하고 6년 뒤인 1780년에 겨우 완공했다.
학교 건물의 북쪽 땅에 생도들의 연병장으로 샹드마르스를 조성할 때 주위에 크고 넓은 석조 해자를 둘렀다. 그리고 동서쪽에 두 개씩, 북쪽에 하나의 작은 돌다리를 놓고 다리마다 멋진 철책에 양쪽으로 여는 문을 달았다. 물을 채우지 않은 해자 안쪽에 느릅나무를 나란히 심고 바깥에는 생울타리를 둘러 멋을 부렸다. 1768년부터 1772년까지 연병장 공사를 마쳤지만, 강변의 ‘일데시뉴’(백조의 섬)까지 매입해서 확장했다. 이렇게 해서, 앵발리드와 샹드마르스의 사이에 큰 바위를 끼고 생긴 ‘그로 카이유’(큰 바위) 마을이 더욱 번성했다.
역사가 자크 일레레는 샹드마르스가 사관학교를 완공한 1780년에 벌써 군사적 목적과 다른 데 쓰인 사례를 소개했다. 어느 날 아침 귀족 두 명이 경마 노름을 했고, 이는 파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고두고 얘기했다고 전한다. 또한 1783년 8월에 화학자 겸 물리학자·발명가인 자크 샤를은 아노네에서 제지업자의 아들들인 몽골피에 형제가 열기구를 띄웠다는 말을 듣고, 며칠 뒤 (샹드마르스에서) 나흘 동안 기구에 수소를 채워서 날렸다. 열기구와 달리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가스를 채운 기구는 연료 공급자가 타는 바구니를 달지 않고 둥실 떠서 오늘날 샤를 드골 공항 근처의 고네스까지 날아갔다. 그 시대의 고네스 주민은 빵을 구워서 파리에 공급하던 사람들이었는데 하늘에서 기구가 떨어지자 기겁했다. 217년 뒤 고네스는 또 날벼락을 맞았다. 음속을 돌파하는 민항기 콩코르드가 2000년 7월25일에 샤를 드골 공항에서 이륙하다 화재가 났고, 88초 후 고네스의 호텔에 떨어졌다. 수소연료전지가 새 동력을 제공하는 시대에는 대형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혁명기와 그 유산을 정착시키는 19세기 내내 샹드마르스는 온갖 사건을 다 겪었다. 1791년 7월17일에 왕을 탄핵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려는 군중에게 계엄령을 내리고 학살한 사건(샹드마르스 학살),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시 사건 책임자 중 한 명인 파리 초대 민선시장인 장 실뱅 바이를 2년 뒤인 1793년 11월 처형한 사건(장소는 광장 북쪽 강변), 1794년 6월8일에 로베스피에르가 국민화합을 위해 집전한 최고존재 제전(fête de l’Etre Suprême)이 샹드마르스에서 있었다. 왕정복고와 제정기의 사건들은 물론 1815년 5월에 나폴레옹 황제가 소집하여 6월1일부터 100일간 열린 샹드메(Champ de Mai), 1830년 7월혁명으로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 된 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필리프 1세가 실시한 열병식 등 정치적 사건을 일일이 꼽기 어려울 정도다.
1863년 10월 초상사진으로 유명한 나다르(본명 Félix Tournachon)는 높이 40미터의 거대한 기구 제앙(Le Géant, 거물)에 두 시간 동안 가스(가스등을 밝히는 석탄가스)를 가득 채운 뒤 13명을 태우고 샹드마르스에서 비행을 시작해서 공중촬영을 감행했다. 그 뒤 샹드마르스에서는 여러 차례 세계박람회가 열렸고, 1889년에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세계박람회와 함께 완공한 에펠탑은 세계인의 이정표가 되었다. 모파상은 에펠탑이 흉물이라고 반대하다가 막상 생긴 뒤에는 그것을 볼 수 없는 유일한 장소라며 자주 올라갔다.
그가 내려다보던 샹드마르스는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고, 1908년부터 1928년 사이에 많이 축소되어 우리의 걸음을 아껴준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