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에서 바라본 앵발리드의 모습. 위키피디아
봉건제 사회에서 왕은 신하들과 권력을 나누었지만, 16세기부터는 왕국의 유일한 주권자이며 신민들에게 아무런 의무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왕은 봉건적 권리를 적용해서 봉신들을 복종시켰지만, 16세기의 법학자들은 법이란 왕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는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왕의 절대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엽까지 도피네·프로방스·브르타뉴가 왕국에 확실히 통합되었고, 조정(朝廷)이 분화해서 행정·재정·법률을 전담하는 기구가 발달했다.
왕은 중세의 영지 수입을 뜻하는 일반세금과 전시처럼 특별한 상황에 한시적으로 걷는 특별세금으로 왕국을 지배하다가 점차 국세를 안정적으로 걷게 되었다. 샤를 7세(1422~1461 재위)는 평민에게
타유세(taille, 15세기부터 왕이 귀족과 군인과 종교인을 제외한 평민과 그 재산에 부과한 직접세), 모든 거래에 소비세, 개인이 일정량을 소비해야 하는 소금세를 정착시키는 한편 1439년에는 귀족이 군대를 양성하지 못하게 하고, 1445년에 기병대, 1448년에 궁수부대를 창설했다. 이처럼 백년전쟁을 겪으면서 프랑스가 봉건체제에서 절대주의 체제로 바뀌어 갔다.
앙리 3세는 1583년 샤를 7세의 원칙을 되살려 군인의 징집권은 전적으로 왕권임을 천명했다. 그는 1578년에 그리스도 자비의 집(Maison de la Charité chrétienne)의 설립을 승인했고 1585년에는 상이군인을 돌보는 임무를 그리스도 자비의 집에 맡기고, 코르들리에 길에 시설을 갖추게 했다. 앙리 4세도 1595년에 우르신, 또는 루르신 길(오늘날의 브로카 길)에 같은 목적으로 그리스도 자비의 집을 하나 더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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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인에게 가혹했던 파리치안총감
16세기에는 종교인들도 왕의 의지를 받들어 모든 형태의 가난을 물리치려는 자선기관을 많이 세웠다. 이러한 기관은 대개 구빈원과 병원의 복합 형태였고, 특히 정부가 세운 시설에는 강제로 구금하는 사례도 많았다. 더욱이 종교인들은 노병과 상이군인을 뜻하는 앵발리드(invalide)를 일종의 ‘봉헌물’로 받아들이고 속인수사(俗人修士)로 대접하여 외투에 푸른 테두리를 두른 흰색 비단 십자가를 달아주었다. 십자가의 중심에는 왕의 문양인 백합꽃이 있는 푸른색 둥근 방패를 흰 실로 꿰맸다. 1610년에 앙리 4세가 살해당한 뒤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는 원호시설을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병과 상이군인은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늘에서 본 앵발리드의 전경. 황금빛 돔이 빛나는 돔 교회를 중심으로 건물과 정원이 배치돼 있으며, 멀리 센강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1624년에 총리대신 리슐리외 추기경은 퇴역군인과 상이군인을 위한 오텔 데 앵발리드(Hôtel des Invalides, 군원호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1633년 11월에 루이 13세에게 간언하여 군인을 위한 병원인 성루이 기사관(騎士館)을 비세트르에 세웠다. 오늘날 파리 중심에서 남쪽 4.5㎞의 크레믈랭 비세트르 7호선 전철역에서 가깝다.
루이 13세는 1633년에 비세트르 기사관의 운영비를 수도원장들에게 부담시켰다. 5년마다 여는 성직자회는 종교인의 현안을 논의하고 왕에게 낼 기부금을 정했는데, 1635년의 총회에서 2년 전의 왕령을 철회하라고 압박했다. 왕은 압력에 굴복했고, 도시민의 일상생활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상이군인을 돌보는 책임을 이행했다.
그러나 시설이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거기 들어가지 못한 노병이나 상이군인들은 거리를 떠돌면서 구걸했다. 1656년에 루이 14세는 가난한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파리의 몇몇 자선단체가 운영하는 시설을 합쳐서 일종의 종합병원(hôpital général)을 세웠다. 구체제의 병원은 구치소 같은 곳이었고, 행려병자·정신병자·거지를 구별하지 않고 수용했다. 왕은 거지들에게 시설에 들어가기 싫으면 파리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거지가 농촌에서 생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무시했다. 언제나 가난과 치안 문제는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에펠탑에서 바라본 앵발리드의 모습. 위키피디아
루이 14세는 1667년 파리치안총감직을 신설하고, 리모주 출신의 라 레니(Gabriel Nicolas de La Reynie)를 임명했다. 라 레니는 샤틀레(Châtelet)에서 검찰관 48명과 기마경찰, 사법경찰을 지휘하면서 거리를 깨끗이 유지하고 가로등을 설치해서 범죄를 예방했다. 라 레니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우범지대를 정화했다. 그는 생드니 문 근처에 있는 극빈자들에게 퇴거명령을 내리면서 마지막까지 남은 열두 명을 잡아 평생 갤리선의 노를 젓게 하거나 끝까지 남은 세 명의 목을 매달겠다고 협박했다. 여느 때는 공권력에 덤벼들던 사람들이 눈치를 살피더니 앞다투어 성벽 구멍으로 도망쳤다.
파리치안총감은 하느님과 맞섰다. 부사제(副司祭) 파리(diacre François de Pâris)는 선행으로 이름을 떨치다 1727년 사망하여 생트 준비에브 언덕 남동쪽 기슭에 있는 생 메다르 교회 부속묘지에 묻혔는데, 그날부터 거기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무덤을 참배한 아낙네가 발작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1731년에 파리치안총감인 에로(René Hérault)는 무덤 앞에 공고문을 붙였다. “왕의 이름으로 신에게 경고하노니 여기서 기적을 일으키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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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12㎏이 들어간 돔 지붕
이탈리아에서 발달한 바로크 양식이 주목받던 시대에 루이 14세는 1664년부터 본격적으로 베르사유궁을 짓기 시작했다. 그것은 프랑스 절대주의의 절정을 과시하려는 듯이 고전주의 양식으로 균형과 안정감을 과시했다.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광장을 설계한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가 베르사유궁 설계에 응모했지만, 루이 14세는 프랑스 건축가인 루이 르 보(Louis Le Vau)에게 건축을 맡겼다. 베르니니는 루이 14세의 흉상을 제작했을 뿐 건축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오늘날 베르사유궁의 디안 살롱(Salon de Diane)에서 우리는 바로크 시대의 최고 걸작품에 속한다는 베르니니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루이 14세는 1670년 전쟁대신 루부아 후작에게 원호시설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파리가 강북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갈 때에도, 강남의 그르넬 들판은 농사를 짓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앵발리드(Hôtel royal des Invalides)의 부지로 적합했다. 왕은 고전주의 양식의 설계를 제시한 브뤼앙(Libéral Bruant)에게 앵발리드의 공사를 맡겼다. 전쟁대신 루부아 후작은 일꾼들을 다그쳐서 1674년에 공사를 마쳤다. 베르사유궁의 건축에 참여한 건축가·조각가들도 앵발리드 건축에 참여했다.
루이 14세가 앵발리드를 방문한 모습을 그린 프랑스 화가 피에르드니 마르탱의 그림(1706년). 위키미디어
우리는 19세기 말에 세운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건너가면서 넓은 광장 너머 브뤼앙이 지은 건물의 북쪽 면 뒤에 쥘 아르두앵 망사르(Jules Hardouin Mansart)가 1677년부터 1708년에 완공한 돔 교회의 둥근 지붕을 볼 수 있다. 정사각형 안에 들어가는 그리스형 십자가 모양으로 지은 교회의 황금색 찬란한 둥근 지붕은 100여 미터나 우뚝 솟았다. 지붕에는 19세기에 여러 차례, 그리고 최근에는 1989년에 황금 12㎏을 입혔다.
또한 루이 14세는 망사르에게 명령해서 앵발리드 생루이 대성당도 짓게 했다. 군인들은 1679년부터 대성당을 이용할 수 있었다. 루이 14세는 앵발리드에 병사뿐 아니라 장교를 한방에 여섯 명에서 여덟 명까지 받아주었고, 수녀 30여 명이 그들을 보살피게 했다. 그들이 군사훈련을 할 수 있는 경우에는 훈련에 참여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가죽제품을 만들거나
수서본(손으로 써서 만든 책)에
색칠을 했다.
브뤼앙의 건물과 센강 사이에는 생제르맹 목초지(일명 종교인들의 목초지)가 있었다. 루이 14세의 말년에 건축가 로베르 드 코트(Robert de Cotte)는 1704년부터 1720년까지 그곳에 남북으로 487m, 동서로 275m나 되는 앵발리드 광장을 조성했다. 그렇게 해서 17세기 센강 좌안에 지은 건축물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앵발리드는 근본적으로 왕권을 빛내주기 위해 헌신하다 다친 병사들과 노병들이 거리를 떠돌지 않고 안전하고 조용하게, 되도록 품위를 지키면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겠다는 루이 14세의 의지를 표현했다.
루이 14세는 1682년에 베르사유궁에 완전히 정착하기 전부터 앵발리드를 좋아했기 때문에 신분을 감추고 불쑥 방문하거나, 장엄한 의식을 치르면서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1717년에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1768년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7세, 1770년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 1777년에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가 앵발리드를 방문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는 1770년 5월에 결혼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국의 대를 이을 아기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애태우다가 아들인 요제프 2세를 파견했던 것이다.
돔 교회 지하 정중앙에 안장돼 있는 나폴레옹 1세의 관.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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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땐 무기 공급처 역할
요제프 2세는 1777년 4월1일에 비엔나를 출발해서 19일에 베르사유궁에 도착했다. 그는 로렌 지방의 팔켄슈타인 백작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여행했다. 그는 동생에게 아기가 서지 않는 이유가 매제 때문임을 알았다. 그는 루이 16세를 설득해서 간단히 포경수술을 받게 했다. 그가 다녀간 뒤 루이 16세 부부는 1770년 이래 처음으로 완전한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1778년에 첫딸을 얻었다.
1789년 7월 초부터 파리 주민들은 혁명에 대한 기대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6월 말부터 파리를 고립시키려는 목적으로 병력을 2만 명이나 파리로 불러들였다. 7월14일에 파리의 투사들은 그들에게 맞서려고 앵발리드로 가서 소총 3만2천 정을 빼앗고 바스티유 요새로 행진했다. 그렇게 해서 혁명은 추진력을 얻었다.
앵발리드는 프랑스의 군사적 영광을 기리는 장소다. 군사박물관, 세계전쟁박물관, 3차원 지형도(군사용 지도) 박물관, 생루이 교회, 군인묘지가 모여 있으며, 나폴레옹 황제의 관을 돔 교회의 정중앙에 안치했다. 1958년에 총리가 된 샤를 드골은 엘리제궁의 대통령 집무실을 앵발리드로 옮기려고 했지만 실현하지 못했다. 샤를 드골 재단은 드골 기념관을 구상하고, 2004년에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승인했다. 2008년 2월부터 앵발리드의 기념관에서는 드골의 생애와 20세기 제5공화국의 역사를 다각도로 보여준다.
중앙 안뜰에서 바라본 앵발리드의 모습. 위키미디어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