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2, 7)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이사야45, 18)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주님의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이사49,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예레미야1, 5)
도공이 도자기를 빚듯 하느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진흙을 빚어 주님의 모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주님의 숨결을 불어 넣으셨습니다.(창세2, 7-8)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이유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작품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얼과 영을 지닌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의 근거입니다. 사람은 모두 모태에서 잉태됩니다. 생명의 첫 자리, 하느님께서 마련하시고 보장하시는 자리가 모태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창조주와 생명의 원천,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 잘못으로 벌을 받고 죽게 되면 하느님께 항변의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께서는 손수 저를 빚으셨는데 이제 생각을 바꾸시어 저를 파멸시키려 하십니다. 주님께서 저를 빚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저를 먼지로 되돌리려 하십니다.” (욥10, 8-12)
영성 신학에서의 첫 질문은 “사람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사람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물음입니다. 중세 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의 핵심은 그 해답을 찾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에서 시작해 인생행로와 역사 과정을 통해 결국 창조주 하느님께 되돌아간다는 귀환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는 옛 가요 ‘하숙생’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생은 나그네 길, 하느님에게서 왔다가(창조신학) 하느님에게로 가는 길(귀환신학)’이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입니다.
반면 불교에서는 인간의 기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어진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던져진 이 현실에서 나름대로 해탈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득도를 통해 성불을 지향합니다. 불교는 인간이 어디에서 왔느냐를 묻지 않고 다만 성불을 위해 그것도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다가가는 자주 자립적 완성관을 제시합니다. 이 점이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근본적 차이입니다.
바티칸이 제사 문화를 수용했다면…
중국 명나라 때, 마테오 리치(1552~1610) 신부는 불교의 가르침을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수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기원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창조주 하느님의 개념을 개의치 않기에 창조신학과 불교의 교리는 도저히 융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외적으로는 승복을 입고 불교와의 친화에 노력했으나 신학적, 내면적으로는 불교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반면 인륜과 도덕, 제사 의례와 상제 사상을 중시하는 유교는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충분히 껴안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당시의 신학적 시각에서는 매우 과감한 주창이었습니다. 이를 보유역불론(補儒易佛論) 또는 보유배불론(補儒排佛論)이라 합니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중국문화를 껴안고 중국을 그리스도교화 하기 위해 사목적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후 마테오 리치의 후배인 예수회 사제들은 그리스도교와 유교 제사 문화의 일치와 융화를 이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1661~1722 재위)는 “만일 가톨릭이 유교 제사 문화를 수용한다면 자신은 물론 청나라 전체가 가톨릭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 있던 프란치스코 회원들과 도미니코 회원들은 매우 배타적이고 수구적이었습니다. 예수회 회원들의 선교 방법을 시기 질투하기도 해서 로마 바티칸 측에 강력한 반대의견을 피력합니다. 오랜 심의 토론 끝에 로마 바티칸은 제사를 ‘우상숭배’라 여기고 불허 결정을 내립니다. 마침내 강희제는 예수회를 제외한 모든 선교사를 추방합니다.
신학생 시절, 이 강의를 들으며 마음이 아프고 아쉬웠습니다. 만일 그때 바티칸이 제사 문화를 수용했다면 청나라 전체가 가톨릭이 되었을 테고 우리나라에서 가톨릭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가 없었을 것이란 상상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사 교수 신부님은 다른 해석을 하셨습니다. 인류 역사는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때 청나라와 아시아 국가가 가톨릭으로 전향했다면 가톨릭이 너무 오만해져 제대로 된 역사적 반성과 성찰을 하지 못했을 것이란 가정입니다. 신학생 시절엔 수긍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그 신부님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불교와 가톨릭이 매우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교리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일반 대중의 인식이 그러합니다. 실제로 두 종교 간의 관계도 매우 좋습니다. 불교의 부처님상과 촛불, 가톨릭의 미사 전례와 십자가상, 성모상 그리고 제단의 촛불 등 외형적 예식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장로회 등 진보적 교단을 제외한 개신교단들은 불교를 우상숭배하는 이단 집단이라 규정하고 맹목적으로 적대시합니다. 현재 상황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물론 진지하게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질문하고 해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행업이 인간의 더 큰 성숙과 완덕을 지향하는 사상적, 종교적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범이 바로 예언자들입니다. 오늘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중심으로 묵상합니다.
'당신과 함께 한 모든 날이 좋았다'를 주제로 한 20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 2017년 3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 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문화 공연을 즐기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예언자 예레미야의 아름다운 용기
예언자들은 모두 용감하고 헌신적이고 장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나약한 인간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저는 부족합니다”라고 겸허하게 자신의 한계를 고백합니다. 때로는 머뭇거리고 때로는 저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 한복판으로 나섭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영’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사로잡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이 관계는 왕과 신하, 주인과 종, 상관과 부하 그리고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로 설명됩니다.
구약성경에서 고난의 예언자인 예레미야(기원전 650~586)는 쇠퇴한 유다왕국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멸망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습니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기초를 놓으시다’, ‘하느님께서 들어 높이시다’, ‘하느님께서 자궁을 해방시키셨다’ 등의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암시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헌신했던 그는 조국 유다왕국의 배신자로 낙인찍히며 온갖 수난과 모함을 받은 비운의 예언자입니다.
그는 한평생 하느님의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본 내면적 성찰과 숙고의 사상가요, 실천가입니다. 그의 내적 체험을 기록한 고백록(10-20장)에서 그의 아픔과 내적 고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계약을 어긴 불충과 불신의 유다 백성들은 징벌을 받으리라”라고 선포합니다.(11-12장). 하지만 백성들은 그를 비웃습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한번 내려와 보시라지”(17,15)라는 빈정거림 앞에서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내적 쓰라림과 허탈도 체험합니다.
아무리 예언자라 해도 “조국이 망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외친다면 그 누가 수긍하겠습니까? 예레미야 자신도 잘 알고 있었으나 그가 하느님께 사로잡혔기에 그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언자가 짊어진 비운의 책무입니다. 그는 아나톳 고향 사람들에게도 배척받고(11,18 이하)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버림받습니다.(12,6;18,18;20,10) 저주와 박해, 살해의 위협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도피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절규합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저를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저를 저주합니다.”(15, 10)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주님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15, 18)
예레미야는 고통의 사나이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전표입니다. 하지만 그의 뼈아픈 체험과 고통은 아름다운 용기와 신앙고백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꾀시어 주님의 꾐에 저는 넘어갔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주님께 제 송사를 맡겨드렸으니 주님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주소서. (20, 7-12)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께 이의를 제기하고 항변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의 실망과 좌절, 어둠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한 철저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개인적 고뇌와 갈등 속에서도 예레미야는 언제나 유다 나라 전체를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예언자의 고뇌는 반드시 공동체를 위한 기도와 헌신이어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공적 활동은 세 시기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요시아왕의 종교개혁(기원전 627~622)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기간이고, 두 번째는 요시아왕이 죽은 기원전 622년부터 609년간의 침묵의 준비기입니다. 바빌론의 침략을 받은 기원전 609년부터 604년까지가 유다의 비참한 멸망을 예고하면서 활동했던 피눈물 나는 고난의 과정입니다. 말년의 세 번째는 기원전 597년부터 586년 사이로, 바빌론의 침략으로 성전 파괴와 약탈, 조국의 멸망을 목격한 절망의 시기입니다.
유다 백성의 새로운 희망
세 번째 공적 활동 시기가 바로 그의 네 번째 비약의 시대입니다. 이때부터 예레미야의 신탁이 극적으로 전환됩니다. 절망 속에서 해방과 희망을 예시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을 심판하시고 이 백성을 꼭 구원해 주시리라 선포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격언의 확인입니다.
바빌론의 멸망과 유다의 해방을 예고한 예언자는 말년에 이집트로 끌려갑니다. 유다 왕정 수구파들이 이집트로 피신하면서 그를 데려갔고,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집트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습니다.
“너희가 바빌론에서 일흔 해를 다 채우면 내가 너희를 찾아, 너희를 이곳에 다시 데려오리라라는 은혜로운 나의 약속을 너희에게 이루어주겠다”(예레미야29, 10)라는 하느님의 선포는 메시아 구원 사상의 바탕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느님의 약속은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유다 백성들을 일으켜 세운 희망이 되었고,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눈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삶 전체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점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세상에 알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을 끝없이 환기시키고 바른길로 가도록 촉구하고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도 그런 존재가 필요합니다. 각자가 소명을 다할 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평화, 약자와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일이 사제와 신앙인에게 맡겨진 구원의 소명입니다.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 온 우주 만물의 신비, 조상들의 삶과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니, 제가 출생하기도 전의 모든 것, 그리고 제 출생의 연원과 과정, 온 생애를 꿰뚫어 보고 계심을 고백합니다. 온 세상 역사와 인류의 모든 삶을 통찰하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늘 올바른 삶을 살도록 다짐하오니 저희 모두 양심에 따라 사는 예언자적 실천가가 되게 하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