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이사야10, 15)
아, 거꾸로 행동하는 너희들!
진흙이 옹기장이와 똑같이 인정받을 수 있느냐?
작품이 제작자를 두고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 할 수 있느냐?
빚어진 것이 자기를 빚은 자를 두고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할 수 있느냐? (이사야29, 16)
불행하여라, 자기를 빚어 만드는 분과 다투는 자!
오지그릇 한 조각에 지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는 자.
진흙이 자기를 빚어 만든 이에게
“당신은 무얼 만드는 거요?”
“당신이 만든 것에 손잡이가 없잖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이사야45, 9)
성경에는 역사와 지혜, 예언이 혼재합니다. 구약성경은 역사서, 지혜 문학서, 예언서 등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역사 자체가 하느님의 행업이며 구원의 사건입니다. 역사 안에 하느님의 작용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잘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는 옳고 그름에 대한 바른 분별력이며 역사 현실에서 우리를 하느님께 이끄는 길잡이입니다. 지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양심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므로, 예언자는 바른 역사관 바른 지혜의 가치를 깨닫도록 지적하고 교정합니다.
예언은 결코 앞일을 예견하는 말(豫言), 점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prophetia)의 참뜻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책무를 가진 예언자가 현재의 역사와 지혜에 대해 선포하는 바가 예언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預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맡았으니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행업입니다. 마치 은행에 돈을 맡기고 필요할 때 찾아 쓰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맡기신 진리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예언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작업입니다. 인류의 지난 행업은 단순한 역사이지만 하느님 안에서 해석하면 구원의 역사가 됩니다. 인간의 삶을 하느님 안에서 해석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고 지혜이고 예언입니다.
<서유기>의 손오공 이야기는 불교의 정수를 전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를 깨달은 손오공이 마침내 부처(鬪戰勝佛·투전승불)가 되었다는 가르침은 오묘합니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우물 안 개구리’ 등 고전적 이야기에는 ‘자신의 뿌리와 기원을 알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동서고금의 선현들이 한결같이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뿌리와 한계를 알라, 겸허하라, 네가 원하는 것을 먼저 이웃에게 실천하라’는 가르침은 사랑과 자비로 이어집니다.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백신을 한 번도 맞지 못한 상태에서 부자 나라들은 4차, 5차 반복해서 백신을 맞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는 격언 또한 성경에 담겨 있으니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기록된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그 핵심은 공동체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기원전 10세기, 중동 지방을 장악한 옛 아시리아 제국의 왕 티글랏 필레에세르 3세(기원전 744~727 재위)는 남진 정책을 펼치며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을 공격했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아시리아 왕국은 주변 국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한편 북 왕국 이스라엘은 반복된 반란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페카는 다마스쿠스의 루친과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에 대항하고, 남쪽 왕 유다 왕국에도 연합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유다 왕 히즈키야(기원전 745년~717년 재위)는 당시의 묘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이를 거절합니다.
아시리아는 티글랏 필레에세르 3세 이후 그의 아들 살만 에세르 5세(기원전 726년~722년 재위), 사르곤 2세(기원전 721년~705년 재위), 산헤립(기원전 705년~681년 재위)에 이르는 4대에 걸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을 침략했습니다. 기원전 721년에는 북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립니다.
당시 유다 왕국은 하느님을 잊고 우상 숭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침략을 받을 때마다 아시리아와 연합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산헤립은 유다 왕국에도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점령을 꾀합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산헤립도 결국은 자신의 두 아들에 의해 살해됩니다. (2열왕19, 37)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도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먼저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라며 아시리아를 꾸짖는 신탁을 기술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상 숭배에 빠진 유다에 대한 벌을 예고하셨지만 유다를 꼭 구원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예시합니다.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은 2차, 3차 공격을 가하고 기원전 688년에는 유다를 포위합니다.
그런데 이 모두는 하느님께서 유다 백성을 꾸짖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아시리아는 하느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겠다’(이사야10, 5)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그럼에도 아시리아는 자신의 힘과 지혜를 과신하며 유다를 약탈하고 크게 멍들게 했습니다. 무지의 행태이며 한계입니다. 약소국을 짓밟은 침략국 아시리아의 교만입니다.
이에 예언자는 외칩니다. “역사를 잘 보아라, 패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더냐? 하느님의 백성인 유다도 꾸짖고 벌주신 하느님께서 침략국 아시리아를 그대로 묵인하실 것 같으냐?”라고 반문하며 희망을 제시합니다. 극도의 오만과 방자가 하느님의 심판과 개입을 불러온 것입니다. 아벨의 피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듯 유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치달았습니다. 예언자는 일갈합니다. “주님께서는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을 다 마치신 다음, 아시리아 임금의 오만한 마음에서 오는 소행과 그 눈에 서린 방자한 교만을 벌하실 것이다.”(이사야 10, 12)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는 수사학적 질문은 아시리아에 대한 꾸짖음일 뿐 아니라 조롱을 담고 있습니다. ‘네가 누구인지 알긴 하느냐? 도끼 주제에 도끼질하는 주인을 잊고 있다니 참으로 웃기는 놈이로구나!’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훈은 시대를 관통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이른바 강대국들에 대한 꾸짖음이며 나아가 정치인, 권력자, 부자, 거들먹거리는 이들 모두에 대한 하늘의 꾸짖음, 역사의 꾸짖음, 그리고 민중의 꾸짖음입니다. 이사야 10장 16절이 바로 결론이며 신앙고백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저는 이 말씀에서 코로나19라는 현상을 떠올리며 묵상합니다. 부와 풍요를 자랑하던 선진국들도 코로나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코로나를 백신으로 제어하는 그 즉시 코로나는 재빨리 변형해 새로운 바이러스가 되어 우리를 괴롭힙니다. 교만하지 말 것이며 매사에 조심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입과 코도 막으라는 의미입니다. 많은 경우에 입은 화근의 근원입니다. 무엇보다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백신을 한 번도 맞지 못한 상태에서 부자 나라들은 4차, 5차 반복해서 백신을 맞고 있습니다. 종교와 교회 공동체도 한 가지입니다.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보고서의 말씀을 깊이 되새기며 사랑의 실천을 다짐합니다.
우리 주변의 숱한 도끼들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도끼, 유엔이라는 도끼, 유럽연합이라는 도끼, 미국이라는 도끼도,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도끼도 자신의 주제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공직자도 모두 도끼일 뿐입니다. 사제와 목사, 승려도 도끼입니다. 재벌과 언론인, 지성인 모두 스스로가 도끼임을 겸허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는 하느님 앞에 늘 부족한 죄인임을 고백하며 겸허한 삶을 다짐합니다. 도끼 처지에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내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도끼를 넘어 전기톱을 사용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기톱도 전기에 의지하고, 전기는 자연과 인간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우주 만물은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오니 저희 모두 하느님과 자연 앞에 늘 겸손한 삶을 살게 하소서. 겸손이 가장 큰 덕목임을 깨닫고 실천케 하소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게 하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