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마태오10, 26-27)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곳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마르4, 21-23)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춰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루카12, 2-3)
우리 속담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으니 늘 신중하게 말하고 매사에 정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춰진 것은 알려진다”입니다. 이 구절의 결이 개별 성경에 따라 앞뒤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금은 비록 소수에게 전달되나 앞으로는 만백성에게 선포되리라’라는 복음의 확장성을 강조합니다. 반면 루카의 병행 구절은 ‘네가 말한 비밀이 언젠가는 공개적으로 드러날 것’이란 사실에 방점을 찍습니다. 이처럼
Q문헌(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원천자료·독일어 Quelle의 첫머리에서 따옴)에서 유래한 동일한 말씀이 복음사가들에 의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다르게 해석됨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복음 말씀에는 선포, 봉사 기능과 함께 거짓을 고발하는 사회적 책무가 담겨 있음이 확인됩니다.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말은 생각의 열매이자 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말은 인격의 척도이며 신격(神格)의 표본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구원의 경륜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존칭어로 표현합니다. 라틴어로는 Verbum, 영어로는 Word입니다. 서양에는 존칭어가 따로 없기에 대문자로서 이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향한 경외심에 기초한 일종의 상식(common sense)이며 공감(sympathy)입니다.
보안사가 경영해온 것으로 밝혀진 서울 관악구 신림본동 카페 '모비딕' 입구. 한겨레 자료사진
상식과 공감은 상통하는 개념입니다. 상식은 이론적으로, 공감은 심리적으로 동의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십인십색이다 보니 상식과 공감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식과 공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훈련도 따라야 합니다. 무엇보다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잘 들으려면 먼저 침묵해야 합니다.
침묵은 내면의 대화로서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양심에 귀 기울이는 자세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한 단계 더 올라간 사람입니다. 교육 과정에서 스승의 말을 듣고, 종교 수덕 과정에서 눈 감고 경전 말씀에 몰입하는 자세입니다. 머리로 깨닫고 가슴에서 영적 불길을 확인하는 과정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 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회심 혹은 영적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강렬하고 깊은 ‘하느님의 체험’입니다.
누구든 살다 보면 뒷걸음질 치고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극기와 자제, 수덕 실천을 반복해야만 합니다. 이는 종교뿐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 스포츠 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초기 교회의 사도들은 세 가지 자세를 제시합니다. 첫째, 황제를 위해 목숨 바치는 군인의 자세. 둘째, 최선을 다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자의 자세. 셋째, 하늘의 비를 고대하며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하는 농부의 자세입니다. (2티모2, 3-7) 신학생 시절, 저는 교수 신부님의 이 해석 말씀을 듣고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도 이 교훈을 늘 교우들과 함께 되새기고 있습니다. 이는 목숨을 건 자세, 최선을 다하는 자세, 진인사대천명의 겸허한 자세입니다.
붓글씨를 쓰면서 선생님으로부터 “목숨을 걸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모든 일에는 순교적 결단이 필수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지금 당장 종말을 맞이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물음을 반복해서 듣고 묵상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매일 첫 미사 때의 마음으로, 생애 마지막 미사라 생각하고, 한평생 유일한 미사라 생각하며’ 미사를 봉헌해야 한다는 철칙을 되새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 가라지, 겨자씨, 누룩, 보물과 진주, 그물, 농부, 어부’ 등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마태오 13장) 이는 결국 우리 각자가 저마다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소명과 함께 언젠가는 우리가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종말의 교훈과 연계됩니다. 죽는 순간, 우리는 벌거숭이가 되어 하느님을 대면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 엎드릴 순간을 생각하며 늘 기도하고 더욱 겸허하게 살아야 합니다.
1972년 10월18일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를 해산했다. 계엄 선포 뒤, 국회(현재 서울시의회 건물) 현관문 앞 보도 위에 올라온 계엄군 탱크. 국정책방송원 소장
제가 성심여대와 서강대에서 강의할 때 일입니다. 저는 조교 선생님에게 학생들의 출석을 일일이 확인하지 말라고 하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업에 충실함은 학생의 기본 책무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여러분은 학비를 낸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워가야 합니다. 저는 일일이 출석을 확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불시에 딱 한 번 확인해서, 만일 그날 결석이면 한 학기 전체를 결석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종말론적 출석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우리에게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오시겠다고 말씀하시며 늘 깨어서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때의 학생들은 모두 사회인이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혼란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공개하면 됩니다. 공개가 바로 고발과 정화 구원의 첫 과정입니다.
성당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수녀님들로부터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다 알고 계신다”는 교리를 듣고 자랍니다. 그리고 이런 교리를 직접 체험하는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성탄절 행사에서는 대개 보좌 신부가 산타 역할을 맡습니다. 산타 복장을 한 사제는 부모들이 준비해 준 선물을 손에 들고 어린이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호명합니다. “철수 어린이, 한 해 동안 잘 지냈나요? 한 달 전에 엄마 말씀을 어겼고 또 동생을 때린 적도 있었고요. 그리고 밥투정도 했네요. 앞으로는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해요. 약속할 수 있지요?” 어린이들은 산타의 말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정말로 산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내가 원했던 선물을 족집게처럼 알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산타를 통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물론 어린이들은 성장하면서 산타가 허구임을 깨닫게 됩니다. 신화가 깨어지는 순간, 큰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이 딛고 있던 발판이 순식간에 사라진 느낌이겠지요.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사람들이 신화 속에 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치한 신앙으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자신만의 이익을 취하는 종교 집단들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신화가 깨졌을 때 가져야 할 믿음에 대해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화를 꾸몄던 겉치레가 사라졌다 할지라도, 그 속에 담겼던 메시지와 교훈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신화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춰진 것은 밝혀지기 마련’이라는 2천 년 전의 성경 구절이 오늘날에도 큰 울림과 교훈을 주는 것은 그것이 핵심 중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구절의 앞부분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뒷부분은 ‘진실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진실의 편에 서라는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마태오 10장 26절이 가장 절절하게 느껴진 때는 독재정권 시절입니다. 박정희 유신 시대의 긴급조치 1호에서 9호까지의 발동을 지켜보면서 ‘아니, 이런 법이 도대체 어디 있어?’라는 생각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정의에 대한 갈구입니다. 더욱더 기막힌 것은 거짓과 공포의 정치였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두 사람은 불법으로 정권을 강탈했으니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경찰, 보안사, 중앙정보부, 검찰 등은 고문과 조작을 통해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고, 법관들은 검찰의 기소장을 제목만 바꿔 판결문이라는 이름으로 낭독했습니다. 그 시절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마련이다’라는 말씀이 사제들의 머리를 내리쳤기에 횃불을 들고 세상 가운데로 나섰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몰라보게 다원화, 개방화되었지만 숨김과 감춤의 수법 또한 교묘해지고 지능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바뀌었다고 해도, 이 성경 말씀은 여전히 불의한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예언자적 선언으로 작용합니다. 이명박 정권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으로 촉발된 촛불 집회와 시국 미사, 2013년 국정원 선거 개입규탄 시위에서도 길잡이 선언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진실을 은폐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무리는 존재합니다. 그들은 가짜를 진짜라고 외치는 사기꾼들이고, 산업 현장의 재해와 안전사고를 감추는 데 급급한 재벌 기업이며, 오로지 권력을 위해 겨레와 나라의 미래를 팔아먹는 정상배들입니다.
우리 시대의 정치인, 공직자, 특히 돈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늘과 역사 앞에 참으로 정직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무엇보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 부모, 선조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춰진 것은 밝혀진다”는 성경 말씀은 우리 시대 의인들에게 큰 힘과 용기이며 희망의 버팀목입니다. 돈과 권력의 힘으로 은폐한 모든 것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도 복잡한 일도 아닙니다. 딱 하나만 지키면 됩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지금 하느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확신과 양심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부들은 우리의 오른쪽 어깨에는 천사가, 왼쪽 어깨에는 악마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은 약하고 어리석어 늘 악마에게 이끌립니다. 천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늘 묵상하고 기도하는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 우주 만물의 신비를 저희에게 모두 밝히 보여주셨지만 때로는 장막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 지성소(至聖所)의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두 폭으로 찢어 모든 것을 환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계시와 보편적 구원입니다. 권력을 남용하고 범죄를 조작하며 사실과 진실을 감추는 모든 거짓 종교인과 정치인들, 불의한 재력가들과 언론인 등 사실을 숨기며 조작하는 이들을 회개시켜 주시고 하느님과 역사 앞에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하느님 앞에서처럼 저희 모두 언제나 밝고 기쁜 은총의 삶을 살게 해 주소서. 이 모든 저희의 염원을 들어 허락하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