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58,6-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태 25,40-45)
붓글씨를 쓰면서 저는 역사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뼈대가 있고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글씨를 써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늘 귓전을 때리는데 제 글씨는 늘 반 정도만 살아 있으니, 쓰고 또 씀으로써 살아 있는 글씨를 만들고자 애씁니다.
붓글씨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기본과 기초가 있습니다. 일찍이 히딩크 축구 감독이 알려준 실천적 교훈입니다. 기술보다 우선하고 중요한 것이 기본 체력입니다. 우리는 흔히 스포츠에서만 기본 체력이 중요한 줄 알지만 사실 정치와 경제, 문화예술,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해당하는 철칙입니다. 종교와 신앙에도 기본과 핵심이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본질을 찾을 때입니다.
4복음 중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덕목을 세 가지 제시했습니다. 바로 자선, 기도, 재계(단신과 금육)입니다. 자선은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야고 2,26)이라는 가르침과 상통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전능하신 주님이기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또한 성체성사를 통한 하느님의 무한한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실천적 측면에서 빵을 나누는 행위 자체가 기적임을 일깨워 주는 교훈입니다.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내 1독에 설치된 철 구조물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유 부지회장은 30일만에 철제구조물에서 구조됐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자선, 기도, 재계…세가지 덕목
1967년 3월26일 바오로 6세 교황은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이라는 회칙을 발표하고 미국과 유럽 등 부유한 국가 지도자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우주 개발도 중요하지만, 첨단기술을 이용해 가난한 지역 주민들을 위한 식량 증식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과 같은 큰 나라는 개방적 이민 정책으로 빈곤 지역의 주민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이라고 호소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과 유럽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그 회칙이 공산주의식 주장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비참한 전쟁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사람이 시작한 일이니 우리가 멈추게 해야 합니다. 러시아의 주교와 사제는 러시아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크라이나의 사제와 유럽 각국의 성직자들은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셔야 합니까? 기도보다 먼저 총을 거두고 손을 내밀어 화해해야 합니다. 전쟁을 멈추는 것이 넓은 의미의 자선입니다.
두 번째 덕목은 기도입니다. 당연히 기도가 첫째일 듯한데,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선 다음에 기도를 제시했습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드리는 기본 행업입니다. 우리는 각자 개인의 안녕을 위해 기도를 바칩니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지 말고 다음 단계로 가야 합니다. 이웃과 공동체,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만 위한다면 그게 무슨 기도냐고 꾸짖으시며, 원수까지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입니다. 기도는 모름지기 이웃과 약자, 공동체 전체를 지향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지구 환경과 생태계, 우주를 위한 더 큰 기도를 바쳐야 할 때입니다.
세 번째 덕목이 바로 재계(齋戒), 곧 단식 등을 통한 금욕적 삶입니다. 단식은 자신의 욕심, 식욕과 소유욕, 본능 등 일체의 원욕에 대한 절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먹어야 삽니다. 그러니 먹는 것을 절제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단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단식과 절제한 만큼을 이웃에게 돌려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는 해방운동
독일에는 두 개의 유명한 자선단체가 있습니다. 미제레오르(Misereor)과 아드베니아트(Adveniat)입니다. 미제레오르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사순절 시편기도의 첫 단어이고, 아드베니아트는 주님의 기도에 나온 말마디로 “주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대림절의 특징적 기도입니다. 1960-70년대 한국은 미제레오르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1989년 세계 성체대회 이후 천주교 서울교구는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한마음 한몸 운동본부’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불교, 개신교 그리고 사회복지공동모금 등 시민사회단체가 사랑과 자선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하느님께로 향한다는 공통의 목적을 위한 서로 다른 과정임을 확인합니다. 단식에서 파생된 행업이 바로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는 해방운동입니다.
이 기회에 이재명 국회의원의 성남시장 재직 시의 행업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저는 사실 억 단위가 넘어가면 돈의 개념을 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이재명 전 시장은 “신부님 같은 분은 꼭 경제를 열심히 공부하셔서 국가 예산을 잘 감시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전 시장은 당시에 대략 6천억 원 정도 되는 성남시 빚을 3년 안에 다 갚았으며 공무원들이 부정만 저지르지 아니하면 국가 예산이 남아돌아 사회복지에 충분히 쓸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제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반대의 사례가 외환은행을 헐값에 팔아넘긴 론스타 사건입니다. 모피아라 불리는 기획재정부 관리들은 물론이고 공정거래위원회와 검찰도 모두 공범자입니다. 검찰이 불법과 부정을 저지르지 아니하고 그야말로 법대로만 집행한다면 우리나라가 훨씬 더 맑고 밝아지리라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함께 종교인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며 가슴 깊이 뉘우치고 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을 되새기며 2500∼2700년 전 이사야 예언자 시대로 올라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을 하면 뭐 하는가? 진정한 종교의 사명은 억울한 이들을 껴안고 그들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일갈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58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을 짓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성전을 짓고 단식을 하는 요식 행위보다 배고픈 이, 억울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핵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2012년 5월 24일 오전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앞에서 참여연대 회원들이 론스타의 외환은행 부당이득 환수추진을 위한 주주모집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anaki@hani.co.kr
배고픔을 겪으면서 고난 체험
그리스도교의 단식일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폭넓게 보자면 단식은 보편적 가치, 평등이란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 끼만 굶어도 배가 고픕니다. 왕도 부자도 권력자도 똑같습니다. 단식은 이렇게 평등과 보편성의 체험과 연결됩니다. 배고픔을 잊어버리면 주변에 고통 받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까지 잊기 쉽습니다.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네가 만난 배고픈 이, 감옥에 갇힌 이, 병든 이에게 해준 것이 나한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웃을 향한 행업이 예수님과 하느님를 향한 행업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묵상하면 구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내 주변의 고통 받는 사람의 처지를 알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1960년대 이후 가톨릭은 큰 변혁을 맞이합니다. 그 변화의 핵심은 민중의 삶과 유리된 관념적 게토적 종교에서 벗어나 과감히 현장 속으로 뛰어드는 봉사와 투신입니다. 가톨릭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1년에 1주일 또는 10일 정도 피정을 합니다. 때로 열심인 이들은 단식도 합니다. 배고픔을 겪으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극히 일부라도 체험한다는 의미입니다. 단식은 극기와 절제의 표상입니다. 이는 죽음의 체험이자 그를 통한 정화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단식을 수행 방법으로 삼습니다.
이런 종교적 의미 외에도 단식은 정치적 항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입니다. 1981년 당시 27살이었던 보비 샌즈는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66일간의 옥중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합니다. 단식을 우리 역사와 연계해 보자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했을 때 우리 선조들은 모두 찬 죽을 먹었다고 합니다. 어찌 밥을 넘길 수 있느냐는 의미에서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위선과 가식을 꾸짖습니다. 단식이란 종교적 행업은 아름답지만 이는 공정과 정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식의 참뜻과 핵심을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형식적인 겉치레 단식, 남의 눈을 의식한 과시하기 위한 단식이 그렇습니다. 단식은 자신의 양심과 자기 완성을 지향할 때만이 가치를 가집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 만드는 것
참된 단식은 불의한 자를 단죄하고 억울한 자에게 자유를 주는 사회적 해방투쟁입니다. 성당 안에서의 경건한 행위가 확장되어 세상 속에서 민중 해방으로 이어질 때 하느님의 더 큰 뜻이 확인됩니다. 그것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정화하고 구원하는 교회의 봉사와 해방 과업입니다. ‘역사기도’를 집필하면서 참된 단식이 바로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는 행업임을 새삼 깨닫고 확인합니다. 정치적 해방이 바로 종교적 구원입니다.
성당에서 공동 참회전례를 거행할 때 저는 늘 공동체의 죄에 대해 함께 뉘우치는 시간을 가집니다.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방기했든 무지했든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동선을 지향해야 하듯이, 사회적 구조악 곧, 공동체의 죄에 대해 모두가 참회해야 합니다.
종교와 사회는 한 실체의 양면일 뿐입니다. 성전 밖에 굶주리고 결박당한 사람들이 즐비한데 그것을 외면한다면 그 종교는 자신의 책무를 망각한 맛을 잃은 소금, 핵심을 잃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진정한 종교적 가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자의 몫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의무이고 사명입니다. 불의를 목격하면 소리를 내야하고, 이웃의 고통을 접하면 양심에 근거해 행동해야 합니다. 장애인 노조, 연세대 청소 노동자,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등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현장과 이웃은 매우 많습니다. 눈살을 찌푸리기 전에 한 번쯤 그들을 나의 가족 그리고 예수님의 현현이라고 묵상해야 합니다.
지난 7월 22일에 대우조선하청노동자 파업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성당과 예배당과 불당에는 크게 봉헌하면서 회사의 종사자들과 일꾼들의 임금은 삭감하고 박하게 지급하는 기업가들도 많습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불의한 일입니다. 종교에 봉헌하는 정성만큼 노동자들에게도 후한 마음으로 임금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기도이며 나눔과 실천입니다.
또한 국가가 저지른 불의와 불법, 이에 조력한 경찰, 보안사, 국정원 직원과 검사, 법관, 공무원들은 하늘을 향해 속죄하고 가족과 자녀들 앞에 양심을 고백하며 진심으로 뉘우쳐야 합니다. 불법과 불의를 저지르고 종교 예식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느님을 속이는 또 다른 큰 죄입니다. 예언자는 지금도 크게 외칩니다. 모든 불의를 멈추고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라고.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느님! 저희는 주님을 찬미하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에 대해 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희가 저지른 모든 죄와 허물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빕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모든 죄 그리고 궐함으로 지은 잘못도 고백합니다. 저의 무심한 언행으로 이웃이 받은 상처와 아픔에 대해서도 반성합니다. 저희는 국가 폭력, 불법과 비리에 대해 눈감고 외면한 적이 많습니다. 저희는 이제 불의를 저지른 이들에 대해 예언자들처럼 당당하게 나서서 맞서고 하느님과 정의의 이름으로 이들을 단호하게 꾸짖습니다. 불의한 국가 권력과 폭력 앞에 억울하게 갇히고 고문당하고 짓밟힌 모든 형제자매들과 가족들의 아픔과 예수님의 고통, 성모님의 아픔, 순교자들의 고난, 순국선열들의 수난을 연계해 묵상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자유와 해방, 석방과 온전한 치유를 위해 이웃과 함께 손잡고 노력하겠습니다. 저희는 형제자매애를 지니고 연대와 일치 속에서 힘을 모아 불의한 자들을 퇴치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하느님,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모든 불의한 자들을 내리쳐 주시고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시고 억울한 형제자매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보장해 주시고 기쁨과 은총을 내려주소서. 그리고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이룩해 주소서.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