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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2017년 3월10일 오전 11시, 말씀의 몽치가 내리쳤다

등록 2022-07-25 10:00수정 2022-07-25 10:13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43) 말씀이 몽치가 되어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한다” 헌재 결정
불의 타파하고 정의를 바로 세웠던 일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14)

“그는 (……) 가난한 이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주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주리라.

그의 말은 몽치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의 입김은 무도한 자를 죽이리라.” (공동번역 이사 11,4)

“너희는 얼마나 더 맞으려고 자꾸만 반항하느냐?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고 마음은 온통 골병들었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데라곤 없이 상처와 상흔

새로 맞은 자국뿐인데 짜내지도 싸매지도 못하고

기름을 바르지도 못하였구나.” (이사 1,5-6)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묘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창세 6,5-6)

이 구절은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심리적 관점에서 묘사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정화하려 40일간 홍수의 벌을 내리십니다. 이때 오직 의인인 노아와 그의 가족만이 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크게 놀란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흩어지지 말자”라며 하늘 높이 바벨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하느님 또한 사람들이 하고자 하면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셨기에 사람들의 언어를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바벨탑 건설은 중단됩니다. 창세기 6~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사시대의 서술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보다는 신화적 어법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언어가 서로 다르고 종족들이 갈라져 사는 현실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자 숙고일 뿐만 아니라, 신앙적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고 하느님 앞에서 뉘우치는 고백입니다. 물론 신화적 기술은 상징적 해설을 통해 진의를 찾아야 합니다.

언행에 책임 지는 게 상선벌악의 기본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로 오셨음을 뜻하는 ‘Incarnation’을 가톨릭은 강생(降生), 개신교는 육화(肉化)라고 번역해 설명합니다. 여기서 ‘Incarnation’이라는 사건과 단어가 서로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번역의 묘미, 해석학의 다양성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을 들었어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대화하며 그 참뜻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의 뜻을 확인하고 종합하는 과정이 바로 친교이자 일치이며 사랑입니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의 왕 안티오쿠스의 박해를 받아 일곱 형제가 목숨을 빼앗기고 차례로 죽어 갈 때입니다. 형제의 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 순교를 권하는 순간에 이르러 자신의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이렇게 합니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는 아홉 달 동안 너를 뱃속에 품고 다녔고, 너에게 세 해 동안 젖을 먹였으며 네가 이 나이에 이르도록 기르고 보살펴왔다.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맞아들여라.” (2마카 7,27-29)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도 생각이 제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아무리 애정을 쏟아부어도 때로는 말과 호소가 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간절한 호소에도 자녀들이 거부할 때 부모님은 매를 듭니다. 그 매는 본래 자리로 되돌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사랑의 매, 사랑의 교육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자유도 거부할 자유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언행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상선벌악(賞善罰惡)의 기본 원리입니다.

2017년 3월12일 오후 6시30분경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476일만에 청와대를 떠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7년 3월12일 오후 6시30분경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476일만에 청와대를 떠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신학은 결국 인간학

말은 인격의 반영, 인격 자체입니다. 같은 원리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 나아가 하느님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하느님의 힘, 곧 성령의 작용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하느님의 구원행업이라 고백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 행업을 기록한 창세기 역시 말씀의 작용으로 시작합니다. 말씀의 행업이 곧 창조입니다. 말씀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닙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창조주 하느님’(성부), ‘구세주 예수님’(성자), 그리고 ‘성화와 성장의 원동력’(성령)이란 세 이름으로 부르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하느님이 인간과 맺는 역동적 관계를 역사적 관점에서 고백하는 전적 봉헌의 집약과 사랑의 총화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과의 그 역동적 관계를 기술한 책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주 저자는 하느님이시고, 사람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필경사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느님과 사람의 합작품인 것입니다. 성경뿐 아니라 과학과 문명, 인류의 모든 역사 과정은 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임을 신앙인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민심이 곧 천심인 것은 인간의 말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곧 신학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에서 피력했듯이 신학은 동시에 인간학입니다. 하느님을 깊이 논하다 보면 결국 사람 이야기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의 힘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누구나 칭찬을 들으면 기쁘고 생기가 돋아납니다. 반대로 야단맞으면 풀이 죽고 우울해집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원수가 되고 완전히 파멸할 수도 있습니다. 말을 경건하게 주고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칭찬하면 고래도 춤춘다는 말이 널리 회자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칭찬이 바로 축복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기억해주시고 칭찬해 주시면 그것이 축복과 은혜입니다. 꾸중과 질타, 지적이 바로 저주입니다.

한쪽엔 성경, 한쪽엔 신문 놓고 설교한 칼 바르트

“말씀이 몽치가 되어”는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처음 접한 순간 저는 가슴이 뛰고, 마치 몽치로 한 대 맞은 듯한 강렬함을 느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사신 예수님의 구원 행업을 기억합니다. 가톨릭의 새 번역은 서두에서 소개한 이사야서 공동번역과 약간 달리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라고 직역했습니다. 의역과 직역을 번갈아 읽고 묵상합니다.

1980년대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에 저는 이 성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느님, 주님의 말씀이 몽치가 되어 세상의 불의한 자를 내리쳐 주십시오’ 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서울교구 주보에도 “말씀의 몽치로 독재자를 내려쳐 주십시오”라고 썼습니다. 주보에 실렸던 그해의 강론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할 때도 제목으로 ‘말씀이 몽치가 되어’를 뽑았습니다.

어느 날, 말씀의 힘을 가장 극적으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21분, 헌법재판소장 대행 이정미 재판관의 결정문을 듣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두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마지막 선언은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한다”였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 그 말씀의 몽치입니다. 몽치가 된 말씀은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세우는 행업으로, 창조와 구원입니다.

여기서 잠깐이나마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이자 개혁교회 목사인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를 기억하고자 합니다. 그는 히틀러 정권에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입니다. 나치에 부역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스위스로 쫓겨났지만, 끊임없이 나치 저항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질문 하나를 받습니다. “목사님, 설교의 비법을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한쪽에 성경, 한쪽에 신문을 놓고 설교를 합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을 성경으로 진단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성경은 현실과 괴리될 수 없고 괴리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강생하여 사람이 되셨고, 이 사실을 기록한 성경은 공동선을 실현해 아름답고 정의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이룩하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온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온 인류를 구원하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저희를 굽어보시고 정의와 평화의 나라로 이끌어 주소서. 또한 성령의 사랑과 불길로 열정의 삶을 살아 모두 함께 큰 기쁨과 충만한 은총을 누리게 해주소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저지른 저희의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모든 잘못도 용서해 주소서.

정의로우신 하느님, 권력을 남용하는 불의한 자들을 ‘말씀의 몽치’로 내리쳐 주소서. 그리고 바른길로 이끌어 주소서. 남북의 일치와 평화를 이룩해 주시고 저희 모두를 구원해 주소서.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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