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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부산 대학생들은 왜 미 문화원에 불을 질렀나

등록 2022-05-16 09:59수정 2022-05-16 10:03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3) 부산 미문화원 방화 항거
미의 전두환 군부독재·광주참상 묵인에 항의
부산 대학생들 80년 3월 미문화원에 불 내
폭력적 방법이었으나 세계에 5·18 진실 알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49-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마태오 10,34-35)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토로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 행업에 대한 신앙고백과 선언으로, 희생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부활이 가능하다는 그리스도교의 역설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마태오 26,52)라며 사도들을 꾸짖었던 것과는 상반된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엇갈린 두 말씀을 깊이 사색하여 분명히 결단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선한 지향과 목적을 가지고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라는 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미국은 물러가라” 부산에 터진 외침

해방 이후 미군정을 거쳐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을 지나오는 동안 미국은 우리에게 절대선,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정통성을 갖지 못한 독재자들은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나 않을까 늘 눈치를 보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정권을 유지하고 연장하기 위해서라면 정상적인 국가가 가져야 할 자존심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내팽개칩니다. 그러한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역사에서 반미(反美)란 구호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이 벌어집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시 중구 대청동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에 10여 명의 학생들이 들이닥칩니다. 학생들은 문화원 복도에 불을 지르고 거리에서 유인물을 뿌렸습니다. 전두환 군부독재에 대한 항거와 광주 참상의 고발 그리고 우방이라는 미국의 허구성을 국제사회에 폭로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불붙는 마음의 표출이었습니다. 이는 침묵과 굴종에 길든 기성세대를 흔들어 깨우는 경종입니다. 불은 2시간 만에 진화되었으나, 안타깝게도 문화원 안에서 공부하던 동아대 학생 장덕술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습니다.

1982년 3월 불타고 있는 부산 미국문화원. 시위 학생들이 외친 “미국은 이 땅에서 물러가라”라는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2년 3월 불타고 있는 부산 미국문화원. 시위 학생들이 외친 “미국은 이 땅에서 물러가라”라는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부산 고신대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이 일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 항거’로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방화라는 방법도 그렇고, 무고한 사망자가 나온 것도 그렇고, 이들이 외친 “미국은 이 땅에서 물러가라”라는 주장도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극단적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을까요. 앞서 1980년 12월 9일에 광주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항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묻혀버린 채, 최규하 대통령을 몰아낸 전두환은 1981년 3월 대통령에 취임했고 불의와 폭압을 정당화했습니다. 광주의 피 흘린 선량한 시민들은 폭도나 빨갱이로 치부되었습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오히려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누구도 그 고통과 슬픔에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언론 역시 눈과 입을 닫았기에 광주는 처절하게 잊혀졌습니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은 바로 그 망각의 장막을 칼로 찢은 것입니다.

학생들은 유인물을 통해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를 용인하였고 5·18 학살을 방조했다고 비판합니다. 광주항쟁 다음 해인 1981년 1월 말,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은 “미국의 지지와 공고한 한미동맹을 확인했다”라고 발언한 바 있습니다. 용인과 방조라는 단어는 자칫 가볍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두환 군부의 위험한 자신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무자비한 살상 행위가 벌어졌으니 미국은 5·18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약속 어긴 정권, 신부까지 구속

사건을 주도한 학생들에겐 바로 현상금이 걸리고 체포 담화문이 발표됩니다. 1982년 3월 30일에 김화석, 이미옥, 최충언, 박원식, 최인순이 검거되고 주동자로 알려진 문부식과 김은숙에 대한 수배령이 떨어집니다. 이 둘은 가톨릭 원주교구 교육원 지하실에 숨어 지냈는데 수배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최기식 신부는 서울 한강성당으로 저를 찾아와 수배자들의 거취를 논의했습니다.

저는 이돈명 변호사 등과 상의하여,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름으로 자수를 위한 조건들을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 허삼수를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달했습니다. ①자수자에 대한 법적 관용 보장 ②이들을 일절 고문하지 않기로 약속 ③이들을 위한 교회의 법적 지원 보장 ④교회와 정부 사이의 약속 이행 등의 조건을 제시하여 청와대로부터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후 현홍주 안기부 차장을 만나 자수 절차를 구체적으로 논의했고, 4월 1일 문부식과 김은숙은 원주교구 교육원에서 나와 안기부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경찰의 총수격인 서정화 내무장관(훗날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안기부가 조사한 내용을 더욱 과장하고 고문을 통해 사건을 조작합니다. 이 사건은 본래 경찰 담당이었으나 학생 검거에 실패했고, 자수의 경로도 경찰이 아닌 청와대와 안기부였기에 경찰은 조직의 사활을 걸고 조작에 혈안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천주교 원주교구 교육원에 은신해 있던 김현장을 문부식과 김은숙의 배후로 지목하고, 그를 숨겨준 최기식 신부를 범인은닉죄로 구속하였습니다.

옥고 치른 김현장의 난데없는 전향

학생들의 분노와 증오를 종교적 믿음으로 승화하고, 비록 불의한 정권이지만 민족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화해를 이루려 했던 사제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대통령 전두환도 사제단에 감사의 뜻을 표했던 사안이었지만, 당국자들의 내부 갈등과 과잉 충성으로 오히려 사제단은 몰매를 맞는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언론은 연일 원주교구를 좌익의 온상인 듯 보도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4월 11일 김수환 추기경은 부활절 강론을 통해 정부에 항의 의사를 전달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항의성명을 발표합니다. 구속된 학생들과 원주교구의 여러 관계자들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김현장과 문부식은 1, 2심을 거쳐 1983년 3월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됩니다. 문부식은 복역 중 1988년 12월 특사로 풀려납니다. 안타까운 점은 김현장의 행보입니다. 그는 10년 넘게 복역하고 사면되었으나 임수경 방북 사건으로 인해 또다시 옥고를 치르고 1993년에야 가석방됩니다. 그런데 1997년 그는 난데없이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를 공개 지지하며 전향을 선언합니다. 2010년 이후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 재심에서도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하기도 합니다. 2022년 현재 그는 국민의힘 광주시당 위원장입니다. 초심을 간직하지 못한 그의 행보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은 1980년대 전두환의 폭압에 맞서 5·18의 진실을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정의와 세계 평화를 수호한다는 미국의 허구성을 국제사회에 고발한 것입니다.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있으나 학생들의 뜨거운 의지와 열정은 뜻있게 기억되어야 합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당사자들이 고문당한 부산시경 대공분실. 항만소방서 맞은편 골목, 동구 좌천동에 있는 이 건물은 1층 고문실의 창문모양이 치안본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처럼 좁고 길다. 한겨레 자료사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당사자들이 고문당한 부산시경 대공분실. 항만소방서 맞은편 골목, 동구 좌천동에 있는 이 건물은 1층 고문실의 창문모양이 치안본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처럼 좁고 길다. 한겨레 자료사진

불의에 맞서 고통받더라도…

1981년 10월 여의도에서 전국적인 가톨릭 행사가 열렸습니다. 가톨릭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미사로 성당 밖에서 열린 최초의 큰 규모의 행사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모였는데 특히 광주에서 오신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 순간에도 그날 한 청년이 바친 기도 내용을 오늘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 저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에 동방박사처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피 끓는 젊음과 정의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불의에 맞서 싸울 이 청춘의 삶을 바치옵니다. 하느님, 받아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때마침 하늘에 십자가 모양의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구름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한국교회에 보여주신 예시입니다. 물밀 듯 들어오는 신자와 외적 화려함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 거짓 증언과 여론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필연적으로 조작된 여론과 정치권력에 의해 수난당하고 죽어야 한다는 예언입니다. 가톨릭이 맨 앞에서 탄압받았던 부산 미문화원 사건은 구름 십자가가 아닌 ‘현실의 십자가’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고 교회를 정화시키는 구원의 도구입니다.

오, 하느님! 십자가의 신비, 그 큰 힘을 이제야 분명히 깨닫습니다. 온갖 음해와 뭇매로 찢긴 모습과 상처, 죄인으로 재판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부활을 꿈꿉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이 우리에게 큰 희망, 새 생명, 부활임을 확신합니다. 1982년 성주간은 참으로 힘든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십자가의 큰 뜻을 확인했습니다. 온갖 수모와 모욕과 모함을 통해 저희는 정화됩니다.

청년학생들은 우리 시대의 어린 양이며, 십자가의 신비를 역사의 현장에서 깨닫게 하는 귀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우리 시대의 고통을 깊이 되새깁니다. 청년 학생들의 결단과 희생을 통해 남북 8천만 겨레와 온 세계인에게 부활과 새 생명을 확인해 주시고 보장해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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