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이 어떤 사람 안에 들어 있다가 그 안에서 나오면 물 없는 광야에서 쉴 곳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전에 있던 집으로 되돌아가야지’ 하면서 다시 돌아간다. 돌아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된 것을 보고 그는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 잡고 산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오 12,42-45)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다. 그 여자는 배 속에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다.”(묵시록 12,1)
박정희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후 우리 모두는 그렇게 바라던 민주주의가 곧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거저 얻은 것은 거저 잃게 마련입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뜻밖의 결단, 그 깊은 뜻을 이해하고 함께 손잡고 유신 잔재를 척결해야 했지만, 우리는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려면 두 배 세 배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야말로 분골쇄신해야 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장을 찢는 결단’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며, 정치 사회적 표현으로는 과거 청산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제대로 된 과거 청산 작업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원죄, 이승만 독재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두 번째 죄, 그리고 박정희 군사반란과 유신독재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세 번째 죄악입니다. 이 때문에 박정희는 갔지만, 그보다 더 크고 무서운 어둠의 그림자가 다가옵니다. 바로 1979년 12·12 전두환의 군사반란과 보안사, 정치군인들입니다. 이들은 5·16 박정희 군사반란보다 훨씬 더 잔인한 변종 바이러스로 5·18 민중학살의 주범입니다.
1980년 5월18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에 따라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자국민들에게 ‘시위 진압용’이 아니라 ‘적군 살상용’ 무기를 휘둘렀다. 엠(M)16 소총에 장착된 대검이 보인다. 5·18재단 제공
1979년 12월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된 날, 저는 석방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TV 뉴스에 나온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발언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뭐랄까 그 어떤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미래는 신민당이 중심이 되어 정권을 창출하고 민주주의를 이루겠다”고 했습니다. 불의한 정권 아래에서 온갖 고초를 당한 분들에 대한 일말의 위로나 공감은 없었습니다.
3명의 거물 정치인, 이른바 3김은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내려진 비상계엄을 해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엔 오직 ‘어떻게 정권을 잡을 것인가’뿐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정권을 잡을 기회를 만들어 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살려야겠단 생각 역시 없었습니다. 게다가 와이에스(YS, 김영삼)와 디제이(DJ, 김대중)가 갈등을 벌이자 불안감이 고조되었습니다.
사실 박정희 사후 민주화운동 실천가들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뜻밖의 사태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11월24일이나 되어서야 400여 명의 민주인사가 YWCA 대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른바 ‘위장결혼 사건’입니다. 그들은 거국중립내각 구성과 조기 총선을 요구했으나 정치권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민감한 반응을 보인 곳은 신군부가 장악한 보안사였습니다. YWCA 회합의 참가자들은 보안사에 끌려가 박정희 시대보다 더 잔혹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박정희는 죽었으나 상황은 더 나빴습니다.
해가 바뀌어도 꿈꾸던 민주주의는 요원했습니다. 정치인들의 반목과 사북사태 등으로 세상은 뒤숭숭했고, 시위는 계속되었습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1980년 2월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을 복권하는 등 마치 서울의 봄에 호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검은 속내를 감춘 위장술이었을 뿐입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챈 대학생들의 시위는 갈수록 격렬해졌습니다. 5월10일엔 23개 대학 총학생회장 명의로 비상계엄의 해제를 요구했고, 14일에는 서울 21개 대학 7만 명의 학생이 서울역 앞에 모여 계엄해제와 조기개헌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5월17일 밤, 계엄령이 해제되기는커녕 전국으로 확대되고 대학교엔 휴교령이 내려집니다. 이화여대 안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그날 밤 저도 체포 대상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5월17일 밤 11시 제가 있던 서울 한강성당을 에워싸고 사제관과 수녀원 등을 다 뒤졌으나, 제의방에 있었던 저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운 저는 새벽 6시 늘 하던 대로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미사가 끝나자마자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9시에 예정되어 있던 어린이 미사는 올리지 못하고,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한밤 중에 수사관들이 수녀원에 난입하고 다음날 제가 끌려가는 모습을 봤던 김리타, 김세바스찬, 박라데우스 세 분의 수녀님들이 받은 충격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몹시 저립니다. 특히 해방 직후 평양에서 주교님과 사제들이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하신 리타 수녀님은 30여년 뒤에 다시 같은 일을 목격하셔서 한동안 실어증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여러 번 가다 보니 조금은 익숙했지만, 그날은 공기가 달랐습니다. 수사관들은 모두 가슴에 권총을 차고 오가는데 여차하면 총을 뺄 기세였습니다. 그날부터 무려 두 달 동안이나 조사를 받았습니다. 제 생애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온통 어둠과 암흑, 절망뿐이었습니다. 김대중을 내란음모죄로 몰기 위한 무서운 음모와 공작이었습니다.
두 달 후 김승훈 신부님과 함께 풀려나 본당인 한강성당에 가서야 광주의 실상을 접했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고, 참담했고 아팠습니다. 성당 내에는 대자보가 붙었고, 온갖 소문이 횡행했습니다.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수많은 시민을 향한 무자비한 폭행과 학살 소식을 접하니 정말이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우리 언론이 제대로 된 보도를 하지 않으니 광주항쟁을 다룬 외국 뉴스를 봐야 했습니다. 독일 뉴스에서는 “히틀러 치하에서도 자국민에겐 총을 쏘지 않았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반복해서 보도했습니다.
당시 저의 동료들은 모두 감옥에 있었습니다. 저만 풀려나온 것이 죄송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광주의 김성용, 조철현 두 사제와 서울의 김택암, 안충석, 양홍, 오태순, 장덕필 신부, 그리고 노동운동가 정마리안나님 등이 서빙고 보안사 지하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분들의 구명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갈 당시는 한강성당 건축 공사를 마무리하고 축성을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의 집을 짓고 완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어디 성당뿐이겠습니까? 모든 일에는 역경이 있게 마련입니다. 풀려났지만 풀려난 게 아니고, 갇혀 계신 분들의 석방을 위해 싸우고 항변해야 하니 이게 바로 그리스도교 신비체의 원리, 공동체 구원을 위한 투신과 해방의 소명임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광주에서 올라온 교우들의 믿기 어려운 목격담을 들으며 광주의 실상을 파악하고 구속된 분들의 석방을 위해 애쓰며 한 해를 보냈습니다.
저는 광주를 방조, 묵인한 미국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 5월8일 이미 미국 대사는 ‘유사시 군이 출동한다면 반대하지 않겠다’라는 공문을 본국에 보낸 상태였습니다. 군인 이동은 미국이 동의한 사안이었던 것입니다. 광주를 계기로 저는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 아님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청산되지 못했을 때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이승만 독재, 유신체제, 전두환 쿠데타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업보를 지금도 껴안고 있습니다. YS와 DJ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전두환은 내란음모죄로 1심에서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하다가 1997년 사면, 복권됩니다. 저는 전두환의 사면이 합당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범죄자를 용서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청산하지 못한 잔재는 오늘날 극우와 수구, 보수란 가면을 쓰고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부마항쟁과 10·26 혁명 그리고 광주항쟁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광주가 완결형이 될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5·18 41주년을 하루 앞둔 2021년 5월17일 오전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민중항쟁 제41주년 추모제'에 참석한 임근단(89)씨가 큰아들 고 김경철 열사의 묘비석을 만지고 있다. 광주/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의 본산이었던 광주는 이제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광주는 수난의 현장이자 피로써 세례받은 곳입니다. 광주의 정신이 광주항쟁으로 불리기까지 많은 분의 증언과 노고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시인이 광주를 노래하고 기렸는데, 저는 그중에서도 “시대의 십자가, 민족의 십자가”란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광주가 바로 ‘민족의 십자가’임을 확인하며 새삼 골고타 예수님의 죽음을 더욱 실감 나게 체험했습니다.
저는 광주 망월동 구 묘역에서 까따꼼베(초기 그리스도교 로마 지하무덤)의 성스러움을 느꼈습니다. 1983년 5월 저는 교우들과 함께 망월동 구 묘역을 찾아 순례하며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날 121번째 묘역에 있는 중학교 1학년 방광범 학생의 무덤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암 투병하던 대학교 2학년 학생은 종교 생활에 냉담 중이었는데, 어느 날 이 소년의 무덤 앞에서 신앙을 되찾고 민족사 안에서 다시 태어나 하느님께 되돌아왔다는 회심의 체험도 떠올렸습니다. 저는 거룩한 죽음을 묵상했습니다. 광주의 희생자들이 바로 우리나라 민족 공동체를 정화하고 승화시킨 숭고한 제물임을 확인하며 광주의 부활을 기도합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진 광주의 희생자들을 기리면서 아직도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피해자와 가족들을 기억하고,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고군분투했던 분들의 노력에 감사드리며 기도드립니다. 이제는 저희 모두가 그 고귀한 뜻과 희생을 되새겨 더 찬란한 민주주의의 기둥이 되도록 힘을 주시고 광주의 희생이 바로 우리 민족의 십자가, 구원과 평화의 도구임을 깨닫고 민족의 일치와 화해, 평화 공존을 위한 새로운 계기가 되게 하소서. 광주 십자가의 희생으로 남북의 겨레, 민족 공동체의 부활을 이룩하게 해 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