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서 3,1-4)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나라를 빼앗기고 쫓기며 이국땅에서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유대인들은 그 어떠한 고난과 곤경 속에서도 절대자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간직하며 정의롭게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며, 자아 완성 그리고 불사불멸에 대한 희망입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민족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의인들이 많이 계십니다. 인권과 자유, 민주와 평등을 위해 몸 바친 선열들을 기리며 기도합니다.
1979년 가을에 저는 영등포교도소에 있었습니다. 10월 27일 날이 밝자, 교도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군복 차림의 교도관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점호하고 아침 식사를 마치면 정치범들을 제외한 모든 재소자가 일터로 나가는데 그날은 작업도 중지되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던 차에 2방에 수감된
장윤환, 안성열, 박종만 동아투위 기자 세 분으로부터 물 뜨러 나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2방이 식수대 옆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물통을 들고 식수대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동아투위 기자 한 분이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겨누며 “신부님, 어젯밤에 김재규 부장이 꽝! 해서 박정희가 갔어요!”라고 속삭였습니다.
저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데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이집트의 노예 해방과 갈대 바다가 갈라지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기적’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알았던 기적은 관념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기적의 의미를 깨닫고 구체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성경이 말한 기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느꼈던 한없는 무력감이 일시에 날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이제 해방되었다, 우리는 자유다’라고 확신하며 성경 말씀에 대해 은총 충만한 내적 체험을 했습니다. 사제가 세속의 일로, 그것도 정치적 참사로 신앙 체험을 한다는 것에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악의 소멸과 공동체 전체의 선이라는 관점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 구원의 역사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저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설정을 위하여 제 삶을 성찰하고 하느님과 역사 앞에 늘 부족한 죄인임을 고백하며, 정화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사실 감옥 생활에서 박정희와 권력자들을 탓하거나 원망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저 나름대로 기도하고 또 시간표대로 지내느라 무척 바빴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의 뜻밖의 죽음은 성서적 관점과 민족사적 시각에서 제게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엄청난 일을 감행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대하여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옥중선언 등을 근거로, 저는 그가 참군인이자 의인이라 생각합니다. 김재규와 박정희는 나이 차이는 있으나, 육사 동기이자 동향 사람입니다. 그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명실상부한 유신정권의 2인자입니다. 불의에 눈감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살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1979년 11월 7일 궁정동 안가에서 진행된 현장 검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한겨레> 자료사진
김재규의 결단을 폄훼하는 사람들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돌발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독재자 박정희에게 직언을 서슴없이 했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시종일관 박정희의 독재에 이의를 제기했고 유신체제에도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감시 대상인 장준하 선생 가족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이 보여준 부마항쟁에 대한 인식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참담했습니다. 그들은 “그 정도 시위대야 탱크로 밀어버리면 된다”라는 식의 막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반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자신의 눈으로 부마항쟁의 현장을 지켜보고자 했습니다. 그는 최루탄을 맞아가며 시위대에 섞여 현장을 지켜봤고, 유신체제의 종말을 예감합니다. 저는 그가 ‘부마항쟁의 세례를 받았다’라고 신학적인 해석을 합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심경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부마항쟁입니다. 그는 유신의 핵 박정희만 제거하면, 바로 뒤이어 부마항쟁과 같이 전 국민이 들고일어나 민주혁명을 펼치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비굴하고 냉혹했습니다. 오히려 민주화된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분들께 더욱 죄송하고 부끄러운 이유입니다.
10월 26일은 우리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박정희 사망 7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바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70은 완결의 의미를 갖습니다. 우연 속에 하느님의 섭리가 내재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일에 충실할 때 하느님은 역사의 걸림돌을 치워 주시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십니다.
10·26으로부터 50일이 지난 12월 8일 저는 영등포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한국천주교의 주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축일로 제게는 더욱 뜻깊은 은총의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어수선했고, 또 다른 군인이 권력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김재규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돈명 변호사를 비롯한 인권변호사들은 필사적으로 김재규를 살리고자 했습니다. 그를 살려야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판은 보안사의 입김 아래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는 김재규의 구명운동이나 옹호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일체 보도를 통제해 그 어떤 언론도 진상을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변호사들의 권고에 따라 저도 안타까운 마음에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도 이리 억울하게 돌아가셨겠구나’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유신의 핵을 깬 김재규를 살리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라 확신했습니다. 동부이촌동 성당에서 구명운동을 위한 서명을 받았습니다. 서명 하나 하면서도 오만 가지 생각과 각오를 해야 했던 시절입니다. 저는 서명을 망설이는 신자들에게 ‘부담되면 세례명만 쓰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날 600여 명이 함께하고, 그 후 사제와 수도자 등 모두 5000여 명이 서명에 참여했습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도 서명을 해주었습니다. 그 후 민가협을 비롯해 서울대 학생회 등, 또 해외에서도 동포들이 구명운동을 펼쳤습니다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김재규 정보부장은 박정희에게 깍듯이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죽어도 좋으니 자신이 재벌과 공무원 등 모든 이의 부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부정과 부패를 청산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만일 그의 청이 받아들여졌다면 이후 우리 역사에서 탄핵당하는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로 “국민들이여,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1980년 5월 24일 서울 서대문에 있었던 서울구치소(서대문형무소)에서 김재규 정보부장의 사형이 집행됩니다. 그리고 그의 의거에 동참한 분도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동안 우리가 무관심했던 다섯 분은 박선호 의전과장, 비서실장인 박흥주 대령(1980년 3월 6일 사형 집행), 김태원 경비원, 유성옥 운전기사, 이기주 경비원입니다. 이분들은 30~40대의 젊은이들로 누구도 김재규 정보부장을 원망하지 않았고,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당당했습니다. “부장님이 같은 명령을 내린다면 지금이라도 실행하겠다”라는 것이 그들의 변이었습니다.
김재규 정보부장과 다섯 젊은이의 유언은 소박했습니다. 여섯 명을 함께 묻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마지막 청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여섯 분을 함께 모셔서 추모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사회는 김재규의 평가를 유보하고 있습니다. 아니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합니다. 무엇이 두렵고 부담스러운 걸까요? 수구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와 진보를 표방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도 ‘김재규를 재평가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끽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김재규란 인물에 빚지고 있습니다. 인권을 보장받을 권리, 심지어는 대통령을 욕할 자유까지도 되찾아 준 것도 그분입니다.
만일 10·26이 없었다면 부산과 마산이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며, 광주보다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거사가 죽음과 암흑을 막았습니다. 이에 저는 부마항쟁, 10·26 혁명, 광주항쟁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삼위일체 관계로 확신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에 김재규 정보부장을 추천했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시절 문재인 비서실장의 제지로 그리고 저희의 미력함 탓에 더는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10·26으로부터 40년이 지난 2020년 5월 김재규 정보부장의 유족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총검으로 무장한 보안사 군인들이 변호사와 법관을 협박한 채 결론 내린 ‘내란 목적 살인죄’는 사실과 법리에 위반되며 사법 살인과 다름없다는 것이 취지입니다. 재심 판결은 아직도 나지 않고 있습니다.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 빚던 중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 했다. 10·26 재평가와 김재규장군명예회복추진위원회의 주최로 열린 이날 추모제는 유가족을 비롯해 함세웅 신부와 이해학 목사, 효림 봉국사 주지 등이 참석해 불교,기독교,천주교 식으로 열렸다. <한겨레> 자료 사진
저는 부마항쟁, 광주항쟁 기념식에 가면 반드시 “우리는 김재규에 빚지고 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우리 사회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김재규’를 금기어쯤으로 취급합니다. 우리가 김재규란 이름을 드러내 놓고 논의하고, 역사적 평가를 하고, 기억하고 추모할 때 비로소 한국의 민주주의가 완성될 것입니다. 10·26을 당당히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립니다.
김재규 부장과 부하 동료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헌신해 온 광주 송죽회 회원들과 이돈명, 유현석, 강신옥 변호사 그리고 곽태영 통일 지사와 김승훈 신부님 등 선배들을 기립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애쓰고 계신 안동일 변호사와 동지 동료들의 노고도 함께 기립니다.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는 매월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여섯 분의 영정을 모시고 추모식을 올린 후 김재규 장군 묘소를 참배합니다. 이 땅에 참 민주주의 실현과 남북의 화해와 일치, 평화 공존을 염원하며 기도하고 여섯 분의 의인들을 함께 기리고 있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이 땅에서 홍익인간의 이념을 간직하며 살아온 저희 겨레는 일제의 침략과 억압 등 숱한 역경 속에서도 몸 바쳐 싸우며 나라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반란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물리친 4·19 혁명의 고귀한 뜻을 무참히 짓밟고 유신독재의 영구 집권을 획책했습니다. 이에 민중들이 항거했고, 이 뜻을 확인한 김재규 부장과 다섯 부하 의인들이 공동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의거를 감행했습니다. 이에 그 큰 뜻을 높이 평가하며 되새깁니다.
하느님, 이 의인들의 좋은 뜻을 확인해 주시고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은 유족들에게는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십시오. 이들의 의로운 뜻을 저희가 꼭 확인하고 실천하겠습니다. 저희 겨레를 깨우쳐 주시고 저희 모두 용기 있고 정의로운 삶을 살게 하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