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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김재규 정보부장은 부마항쟁 군중 속에서 ‘혁명’을 직감했다

등록 2022-04-18 09:59수정 2022-04-18 10:10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29) 부마항쟁

79년 10월 부산대·동아대 시위 시작
마산으로 번져 부마항쟁 불 타올라
김재규 부장 변장해 시위군중 관찰
단순 시위 아닌 혁명 항쟁임을 직감
10·26 이어 광주항쟁으로 계승돼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은 원로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기와 함께 자라난 젊은이들과 상의하여 …… 그들이 일러준 대로 백성들에게 말하였다. ‘선왕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그렇지만 나는 그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리라. 선왕께서는 너희를 가죽 채찍으로 치셨으나 나는 쇠 채찍으로 다스리리라.’ 왕은 이처럼 끝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1열왕 12,8.14-15)
“정직한 사람은 의롭게 살아 구원을 받지만
사기꾼은 제 욕심에 얽매인다.
불의하게 살면 기다리던 것도 죽음과 함께 수포로 돌아간다.
허튼짓을 하면 바라던 것도 물거품이 된다.” (잠언 11,6-7)

지혜의 대명사인 솔로몬도 말년에는 이성과 신앙을 잃고 방종과 미신에 빠진 나머지 결국 그 자식 대에 나라가 분단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더 큰 원인은 바로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오만과 방자함 때문이었습니다. 오만이 바로 분열과 멸망의 씨앗입니다. 한결같이 초심을 간직하라는 선현들의 참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에 이어 윤석열 당선자가 취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전임 대통령 중 여덟 분이 사퇴 또는 사살, 투옥, 비운의 죽음을 맞았고, 다른 두 분은 정상적으로 퇴임했지만 자녀들이 옥고를 치렀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핵심 덕목은 선배들의 조언을 귀담아듣는 경청의 자세와 자신의 말을 실천하고 책임을 지는 솔직함입니다. 이번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정면에는 ‘겸손하게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라는 글귀가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말에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실천이 없는 죽은 표어이기 때문입니다. 그 표어를 대할 때마다 저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부패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979년 10월16일 부산대에서 일어난 시위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엄청난 태풍을 불러온 나비의 날갯짓이 되었다. 부마항쟁 때 거리행진을 벌이는 시위대를 시민들이 바라보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10월16일 부산대에서 일어난 시위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엄청난 태풍을 불러온 나비의 날갯짓이 되었다. 부마항쟁 때 거리행진을 벌이는 시위대를 시민들이 바라보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부산엔 비상계엄, 마산 일대엔 위수령

1979년 10월 16일에서 20일 사이에 부산과 마산의 청년 학생, 시민들은 민중 봉기를 통해 박정희 유신정권에 결정적 일격을 가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마항쟁입니다.

1970년대 후반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강압적 조치들이 극에 달했습니다. 반정부 인사들은 감옥에 갇혔고, 노조는 핍박받았고, 대학생들은 숨죽여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야당 총재인 김영삼은 총재직이 정지되고 의원직이 박탈되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다반사였습니다.

1979년 10월 16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에 500여 명의 학생이 모였습니다. 학생이 단상에 올라 “학우 여러분!”이라고 외치기만 해도 경찰이 출동해 잡아가던 시절입니다. 학생들은 “유신정권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학원 민주화, 언론 자유와 인권 보장을 요구했습니다. 부산대 학생들은 교문을 벗어나 가두시위에 나섭니다. 같은 시간 부산 동아대에서도 시위가 시작되어 시내로 진출한 부산대 학생들과 합류합니다.

학생들이 시내로 나오자 경찰이 진압에 나섰습니다. 거리 여기저기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경찰은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했습니다. 시민들은 도망치는 학생을 숨겨주고 경찰에게는 야유를 보냈습니다.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의 경찰, 학생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시위였습니다.

17일이 되자 시위의 양상이 바뀝니다. 일반 시민이 시위에 대거 합세한 것입니다. 17일 오후까지는 분명 학생들이 주도하는 시위였으나, 밤이 되자 사무직 노동자, 직공, 점원, 영세상인, 날품팔이, 무직자들이 시위의 선봉에 섭니다. 부산시경이 작성한 문건에는 ‘20세 전후의 불량 성향자들이 대학생을 가장해 합세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간 시위대의 규모는 5만 명에 이르렀고, 시위는 점차 시민 항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는 18일 마산으로 번집니다. 경남대학 학생들과 일부 시민이 가담한 시위대는 파출소로 몰려가 벽에 걸린 박정희 사진을 부수기도 했습니다. 19일이 되자 시위는 더욱 격화됩니다. 부마항쟁의 특이점이라면 유신체제뿐 아니라 경제 부조리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 말은 2차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성장 지상주의와 정부 주도의 과잉투자가 역풍을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은 고스란히 하층 도시 노동자의 몫이었습니다. 부마항쟁 시위대가 부유층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고 세무서를 공격하고 ‘부가가치세를 없애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는 점에서 충분히 짐작됩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이틀 뒤인 20일에는 마산과 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합니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시위대를 강도 높게 진압했습니다. 그 후 산발적 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부산으로 보면 3~4일, 마산으로 보면 2일 만에 부마항쟁은 사그라집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부마항쟁의 현장을 직접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군중 속에 섞여 최루탄을 맞아가며 시위대를 관찰했고, 이는 단순한 학생 시위가 아니라 혁명 수준의 항쟁이라는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예견했을 것입니다.

마산 항쟁 당시 마산역에서 벌어진 시위 모습.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마산 항쟁 당시 마산역에서 벌어진 시위 모습.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부마항쟁은 인간다움의 회복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우리는 부마항쟁의 실체를 똑바로 대면할 수 있게 됩니다. 부마항쟁 20주년이 되는 1999년, 부산대 도서관 자리에 부마항쟁 발원지 표지석이 세워졌습니다. 표지석엔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민주주의의 신새벽 여기서 시작하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201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 제40주년 기념식이 처음으로 정부 행사로 열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했습니다. 또한 10월 16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됩니다. 40년이 지난 후에야 국가가 부마항쟁을 민주화 항쟁으로 인정하고 제대로 기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많은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는 부마항쟁을 ‘인간다움의 회복’이라 정리했습니다. 목숨을 위협받는 군부 정권 아래서 ‘어떻게 시민들이 유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을까?’란 의문에 대해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놓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정권에 부역하는 정치인, 지식인, 지도층을 보며 청년 학생 시민들은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부끄러움이 인간성을 깨우치게 한다고 말합니다.

부산대학이 유신대학인 점이 부끄러웠고, 부산, 마산, 창원 등 경상도 지역이 독재자의 아성인 점이 또한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한 시민들의 정신은 살아납니다. 살아 있었기에 그들은 모두 일어섰습니다. 사실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사건이 부마항쟁의 촉발제가 되기는 했지만, 근저에는 이 ‘부끄러움’이라는 시대정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사회, 교육, 경제, 문화, 정치,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부끄러움’을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부끄러움을 잊었다는 것은 양심의 상실, 도덕의 상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성의 상실이기도 합니다.

국정감사장에서 우리는 뻔뻔한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을 봅니다. 이중 잣대의 여야 국회의원들 그리고 왜곡 보도로 일관하는 더욱 뻔뻔한 조·중·동 등 수구 언론의 보도에 슬픔과 분노를 느낍니다. 이러한 불의한 현실에서 우리는 모두 순국선열과 민주 희생자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정화되어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 또한 사제들과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무섭게 꾸짖으셨습니다. 그 꾸짖음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 선조들과 역사 앞에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정직한 삶을 다짐합니다. 부마항쟁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각성시키고 목숨을 건 결단으로 이끈 역사적 길잡이이며 스승입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부마항쟁, 10·26 혁명, 광주항쟁은 삼위일체와 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청년 학생, 시민 등 공동체 구성원들의 헌신과 결단을 깊이 되새깁니다. 정의와 자유, 민주와 평화 공존의 가치로 공동선을 위해 투신한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광주항쟁의 희생자들과 10·26 의인들을 기리며 기도합니다. 부끄러움을 깨닫고 실천한 양심인들의 이 고귀한 행업을 저희 모두 이어받고 간직해 후손들에게 계승케 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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