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이사야 62,1)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리라.” (시편 137,1.4-6)
사람은 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과정’이라고 그리스도교는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한 차원 높은 삶, 무한한 영생의 삶을 전제한 가치관 설정입니다. 생명의 범주에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신의와 우정, 정의와 공정, 동족과 공동체라는 사회의 연대적 가치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신앙과 신의, 조국애와 동포애가 바로 그 예범입니다. 교회와 조국, 모교와 고향을 사랑하고 그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 때문에 시온과 예루살렘을 기리고 칭송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이 자리 잡은 예루살렘이 곧 하느님의 현존과 모국의 상징입니다. 고향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단순한 장소를 넘어선 그 어떤 초월적 의미를 지닌 이상향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두 가지 유형의 고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의구현 청년전국연합의 이명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이 소중하듯 1970~80년대 수많은 이들에게 명동성당은 아주 귀중한 영적 보루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겐 젊음의 추억이 깃든 낭만의 장소이고, 또 누군가에겐 고난과 투쟁의 장소입니다. 한때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였고, 민주화에 투신한 청년 학생들의 성채였습니다.
1974년부터 청년 학생들이 명동성당에 모여들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여도 좋고 아니어도 좋았습니다. 그들은 신앙 활동을 하면서 인권 운동,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대표적 인물이 중앙대학교 학생 이명준입니다. 그는 1974년 4월에 클레멘스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사제가 될 열망도 지닌 열심한 청년이었습니다.
이명준 학생은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보좌사제를 보필하며 청년회를 활성화했습니다. 명동성당 보좌신부의 사제관 문은 늘 열려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제관은 청년들의 만남의 장소였고, 책장과 책꽂이는 암호로 이루어진 청년들의 약속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명준 학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본떠 ‘정의구현 청년전국연합’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10여 개 대학에 다니는 가톨릭 신자를 대상으로 모임을 결성해 보다 조직적인 운동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저는 ‘아, 이제 가톨릭의 청년 시대가 열리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기뻤고, 그 자리에서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어 일체의 모임이 금지되었습니다. 당시 정치적 발언을 이어가던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정권의 눈엣가시이자, 모두가 전전긍긍하는 골칫거리였습니다. 이에 한국주교회의가 잔꾀를 냈습니다. 김남수 등 일부 주교들과 이종흥 사무처장신부는 사제단 활동을 수용한다면서 “우리가 앞장설 터이니 사제들은 교회 내의 사목 활동에만 전념했으면”이라는 담화문을 내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점잖은 말이었지만, 사실상 사제단 활동을 막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우리 사제들은 의연하게 대응했지만, 내심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종흥 사무처장신부를 찾아가 왜곡된 담화문에 대해 크게 항의했습니다.
명동성당서 활동하던 대학생들
긴급조치 9호 이후 전원 구속돼
“유신법정 인정 못해” 재판 거부
한명씩 판사실 데려가 선고하자
대표격 이명준이 판사에 고함쳐
징역 7~10년씩 무지막지한 선고
1975년 11월 명동성당 ‘7인위원회’ 사건 관련 대학생 23명이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재판 거부를 선언한 뒤 나오는 모습. 기독자민주동지회 제공
유신헌법 권위 부순 7인위원회 사건
5월 22일 서울대 학생들이 긴급조치에 반대하며 유신 철폐 운동에 나섰고, 이명준이 이끄는 정의구현 청년전국연합도 움직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5월 하순, 청년전국연합의 소식이 어떻게 새나갔는지 활동도 해보지 못하고 23명이 체포되고 맙니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7명과 그 외 16명입니다. 사제들도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학생들과 친분이 깊었던 이기정 보좌신부와 사무원 데레사는 공범자로 체포되고, 저도 배후로 지목되었습니다.
가톨릭대학에서 강의를 끝내고 나오다가 혜화 유치원 앞에서 체포된 저는 며칠간 중앙정보부에 끌려다니며 조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청년 신자들과 대화를 나눴으며, 학생들의 복음 정신과 정의로운 일에 동의했다”라는 답변만 반복했습니다. 어떻게든 저를 학생들의 배후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 같았습니다. 며칠 후 저와 이기정 신부, 사무원 데레사는 나왔지만, 학생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활동했던 일곱 명의 학생은 검찰에 의해 ‘7인 위원회’란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학생 운동사에 한 번도 없었던 놀라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체의 조사와 재판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유신헌법을 부정해서 잡혀 온 사람이 어찌 유신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재판을 거부한다”라고 외치며, 검찰 신문에 일절 응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지법 대법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9호의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청년전국연합은 역사에 남을 큰일을 했지만,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가혹한 고문과 폭력은 지금까지도 그들의 정신과 육체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체포한 후 며칠 동안 잠도 재우지 않은 채 무섭게 물고문을 가했습니다. 중앙정보부 6국 지하실은 건물 좌우 끝을 돌아 뒤 계단으로 연결되는데, 이들은 지금도 남산을 지날 때면 그때의 악몽이 떠올라 더 굳게 인권과 민주 평화를 다짐한다고 합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리하게 기소하려 했다가 취소하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합니다. 그들은 모두 그해 6월 중순 서대문 구치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이명준님은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사형장을 바라보며, ‘주님! 제 목숨을 지켜주십시오!’ 끝없이 기도 올리며 펑펑 울다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오니 주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 올리니 갑자기 등짝에 불길이 확 지나가는 느낌을 받으며 내적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그 밤 이후 평화로운 마음으로 구치소 생활을 했습니다. 저희가 받은 모두 두 번의 재판은 검찰 구형으로 끝났습니다. 저는 구형 15년을 받았습니다. 혼자 꽁꽁 묶여서 주임 판사실에서 재판을 받았고, 선고되었습니다. 배석 판사 중 한 명이 바로 양승태였습니다. 최근에 확인했더니 양승태의 경력에 이 재판의 기록은 없었습니다. 판사 옆에는 정체불명의 중년 남자, 즉 중앙정보부원이 앉아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이 판사 앞으로 끌고 가길래 ‘이게 무슨 재판이냐?’ 하고 판사의 책상을 발로 걷어찼습니다. 판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옆에 있던 중앙정보부원이 판사가 들고 있던 종이에 볼펜으로 어느 지점을 찍으니까 그제야 판사는 ‘징역 8년, 자격정지 8년’을 선고했습니다. 그것으로 재판은 끝났습니다.”
고 백남기씨도 당시 수배돼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학생들에겐 통상적으로 3년 이하의 형량이 선고된 데 반해, 청년전국연합의 주도자로 지목된 7명은 괘씸죄가 적용돼 중형을 선고받습니다. 리더격인 심지연은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 이명준과 한경남, 김용석은 징역 8년에 자격정지 8년, 박홍석과 선경식, 조성우는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입니다.
2016년 9월 25일 박근혜 퇴진 민중 총궐기 시위에서 경찰의 차 벽에 항의하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선종한 백남기 농민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1975년 당시 중앙대생으로 이 모임에 함께해 수배 중이었던 그는 피신 중에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해 수사 생활을 했고, 그 후 수도원을 떠나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내용이 당시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핍박받고 고통받았으나 세상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공명심에서 한 일은 아니지만, 의로운 일이 묻히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저로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때 만일 이기정 신부가 함께 구속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랬다면 교회가 더 많이 움직였을 것이고, 언론도 이 사건을 크게 다루어 ‘학생들의 고통을 아주 조금이라도 줄여 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그때의 일을 늘 마음의 빚으로 담고 있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2013년 2월 14일, 학생들은 모두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인받았습니다. 참고로 당시 구속되었던 23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심지연(서울대 대학원생) 박홍석(서울대 국사) 이명준(중앙대 신방4)
한경남(고려대 정치외교4) 김용석(연세대 정치외교4) 선경식(외대 행정과 졸업)
조성우(고려대 행정4) 김헌웅(고려대 농경4) 김 철(연세대 국문4)
강기종(연세대 법학4) 박계동(고려대 정치외교4) 이정국(고려대 정치외교4)
정민수(외대 이태리어3) 민병권(외대 이태리어1) 우영제(외대 이태리어)
윤서영(외대 포루투갈3) 박진선(이대 수학3) 송영길(서울대 사회3)
최 열(강원대 농화학4) 이명복(외대 법정학부1) 서상섭(서울대 대학원 졸업)
여석동(경북대 정치외교4) 장성효(서울대 사회4)
청년전국연합 회원들은 출옥 후에 환경, 교육, 정치, 민주시민, 통일 등 여러 분야에 투신해 이제 70대 중반의 원로들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의 헌신으로 명동성당은 청년 학생들의 집결지가 되었습니다. 명동성당청년연합회(명청년)가 결성되었고, 이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명동성당을 지키고 시민들과 함께 전두환 독재 타파의 중추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의 그 열기가 천주교 서울대교구 새 교구장 시대에 다시 재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명동성당이 다시 청년 학생들의 모임터가 되기를 꿈꿉니다.
우리 역사에는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의인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신앙과 신념을 위해 순교하신 분들,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독립운동가들,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청년학생과 시민 등, 이름 모를 그분들이 우리 시대를 지탱하는 뿌리입니다. 저는 묵념할 때마다 늘 마음속으로 “순국선열들과 익명의 희생자들을 기리며”라고 말하곤 합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큰 용기로 칠흑 같은 어둠의 시대를 빛내고 시대정신을 벼리는 칼날이 되어 준 청년학생과 민주시민들을 기리며 기도합니다. 불의에 무릎 꿇지 않고 폭압에 물러서지 않았던 그들 덕분에 오늘날 저희는 큰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저희 모두 하느님 말씀 안에서 더 정의로운 세상과 더 민주적인 시대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또한 몽매함에서 깨어나 독선과 이기주의로부터 공존과 평화의 길로 방향을 바꾸도록 이끌어 주시고 도와주소서.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함세웅 |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