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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논쟁 라이벌 함석헌-윤형중 신부가 민주회복 선봉에 섰다

등록 2022-03-14 09:59수정 2022-03-14 10:11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24) 민주회복국민회의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8,1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서 8,28)

1974년, 그해는 참으로 살벌했습니다. 대통령의 말이 곧 법이었던 시절, 헌법을 수정했으면 좋겠다는 말 한마디에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한국 헌정 사상 가장 많은 사형과 무기징역이 쏟아졌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그 해가 역설적으로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빛나는 인권운동의 정점이었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은 더욱 찬란하기 마련입니다. 청년 학생들의 항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결성,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선언, 구속자가족협의회 모임, 문인 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불의한 유신독재에 ‘아니오!’를 외치며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또한 10월 9일 가톨릭은 전국의 주교들과 교황대사 등 500여 명의 사제들과 2만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 혜화동 가톨릭대학 교정에서 성년(聖年)대회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날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님은 미사 중 강론에서 구속자들의 석방 요구와 함께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미사 후에는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 2천여 명이 혜화동 로타리까지 평화 시위를 펼쳤습니다. 한국 가톨릭이 민족사 안에서 새로 태어난 기적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박정희 정부는 김재덕 주교님을 즉각 구속하려 했으나 이전 구속되었던 지학순 주교님 사건과 바티칸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해 엄포만 놓고 끝냈습니다.

11월 22일에는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방한했고, 동행한 슈나이더 안보담당 자문위원은 조지 오글 목사, 제임스 시노트 신부 등 미국인 선교사 9명과 만나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특별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다소 누그러진 분위기를 기회로 종교인, 법조인, 교수 그리고 정치인들이 뜻을 모아 범국민적 조직을 결성합니다.

유신독재의 탄압 심하던 1974년
각계 참여한 ‘민주회복국민회의’
범국민적 항거운동의 구심 역할
민주주의 자신감 국민에 심어줘

1975년 2월 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거부와 양심선언 운동을 발표하고 있는 민주회복국민회의 상임대표 윤형중(오른쪽) 신부와 대변인 함세웅(왼쪽) 신부. 사진 연합뉴스
1975년 2월 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거부와 양심선언 운동을 발표하고 있는 민주회복국민회의 상임대표 윤형중(오른쪽) 신부와 대변인 함세웅(왼쪽) 신부. 사진 연합뉴스

보수성향 윤형중 신부의 결단

1974년 11월 27일 함석헌, 이병린, 천관우, 김홍일, 강원룡, 이태영, 이희승의 7인 위원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재야인사 71명이 참여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발족했습니다. 그들은 선언문을 통해 현행 헌법의 개정, 복역 · 구속 · 연금 상태에 있는 모든 인사의 사면과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와이엠씨에이(YMCA)에서 창립총회(12월 25일)를 열기로 하고 상임대표에 윤형중 신부님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나는 은퇴했고 몸도 아픈데”라고 말문을 여시더니 “그게 전교(선교활동)에 도움이 되는가?”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 바로 전교입니다”라고 힘주어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신앙인 한 사람의 회개로 세상은 변화할 수 없습니다. 사회공동체의 영성과 공동체의 변화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데에 신부님도 동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12월 25일 중앙정보부는 YMCA 건물을 원천 봉쇄했습니다. 이에 모임 장소를 명동성당 주교관으로 바꿉니다. 성탄 미사를 위해 많은 신자가 명동성당에 모였기에 기관원들의 감시를 벗어나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드디어 오후 2시, 3층 회의실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날부터 윤 신부님이 계신 주교관 건물이 사실상 민주회복국민회의 회합소가 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제재로 민주회복국민회의 회원 그 누구에게도 사무실을 임대 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임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윤형중 신부님을 상임대표로 하고 함석헌, 천관우, 이병린, 이태영, 김영삼, 양일동 등을 대표위원으로 홍성우, 한승헌, 김병걸, 김정례 등을 운영위원으로 선임했습니다. 윤보선, 백낙준, 김홍일, 유진오, 김대중 등은 고문을 맡았습니다. 저는 대변인으로서 윤 신부님을 보좌하기로 했습니다. 성당에 대해서는 정권이 직접적인 통제와 감시를 할 수 없었기에 가톨릭교회가 많은 역할을 부여받았던 것입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정치인과 종교계, 교수, 법조인 등 사회 각 부문의 활동가들이 폭넓게 참여함으로써 반유신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창립총회에서 윤형중 신부님과 함석헌 선생은 처음 만났습니다. 1950년대 말 <사상계>에서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두고 불꽃 튀는 논쟁을 했던 두 분이 이제 70대 초반의 노령에 만나 서로 포옹하며 소년처럼 환하게 웃었습니다. 윤형중 신부님은 지극히 보수적인 분이고, 함석헌 선생은 매우 개혁적 성향이었지만 두 분은 ‘민주화’라는 대의에 하나로 통했습니다. 저는 이 순간 민족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 민주주의와 인권회복을 위한 투신에서 보수와 진보는 바로 한 실체의 양면일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1975년 1월 6일, 윤형중 신부님은 명동성당에서 연두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현행 헌법 철폐와 민주적 헌법의 채택, 현 정권의 대오각성과 책임 있는 결단만이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는 길이다”라는 내용을 발표합니다. 신부님의 기자회견은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졌던 유신헌법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각하의 권력욕이 애국심을 넘어”

1975년 1월 22일, 박정희는 특별담화에서 유신헌법 찬반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쳐서 자신의 신임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여담이지만 김재규 부장은 1980년 재판정에서 ‘박정희를 처단해야 한국의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라고 확신한 계기가 유신 선포였다고 했습니다. 유신헌법 선포 당시 박정희에게 “각하의 권력욕이 애국심을 넘어섰습니다”라고 직언했음을 그는 수사과정과 재판정에서 수차례 반복해 진술했습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1975년 2월 예정된 유신헌법 국민투표 거부 운동에 나섰습니다. 반유신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조직도 확장되었습니다. 전국에서 자생적 조직이 만들어졌고 산하 단체로 가입하겠다는 연락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조직 구성에 참여한 분들은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공권력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홍성우 사무국장과 김정례 운영위원이 먼저 체포되었습니다. 선언에 참여한 교수들도 대학에서 쫓겨났습니다. 국립대학에 계셨던 백낙청 교수, 김병걸 교수 등은 파면되거나 권고 사직 되었고, 사립대학에서 강의하셨던 안병무, 문동환, 서남동 교수 등에게는 엄중 경고가 내려졌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김윤식, 계훈제 두 분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참여했던 많은 분이 불법적인 미행, 감시, 연행, 가택 수색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국가 폭력이 공공연히 자행되던 고난의 시기에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청년, 학생, 시민, 노동자, 농민, 지식인을 결집시킨 구심점이었습니다. 개신교, 불교, 가톨릭 등 종교도 하나로 뭉쳤습니다. 학생과 교수가 어깨동무를 했고, 재야인사와 야당 정치인이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유신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민주인사들과 종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모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민주회복국민회의는 큰 의미를 갖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확인한 시기였고 연대 활동으로 공동선을 실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만들었습니다.

긴급조치 9호로 강제 해산

민주회복국민회의가 활동할 당시 저는 30대의 청년 사제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서약한 사제라면 일반적인 사회인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자청한 것입니다. 불의에 분노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대변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제인 저와는 다른 삶을 보장받은 청년 학생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며 매 맞고 감옥에 가고 고통을 자초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기꺼이 멍에와 십자가를 졌으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대의 파수꾼이라고 생각합니다.

1975년 4월 베트남의 공산화를 빌미로, 박정희 정권은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고 유신체제의 비판과 일체의 모임을 원천봉쇄 했습니다. 이와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의 활동도 중단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윤형중 신부님과 천관우 선생님 두 분이 대표로 활동하면서 정당을 포함해 펼친 범국민적 항거였습니다. 선열들과 선배들을 기리며 기도합니다.

참고로 1974년 11월부터 1975년 4월 말까지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발표한 성명서의 제목을 소개합니다.

선언문 – 민주회복을 위한 국민선언 (1974. 11. 27)

성명서 – 서명 인사에 대한 탄압을 규탄한다 (1974. 12. 6)

성명서 – 윤형중 신부의 연두 기자회견 (1975. 1. 6)

성명서 –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을 듣고 (1975. 1. 15)

성명서 – 연행 사태를 즉각 중지하라 (1975. 1. 17)

성명서 – 동아일보 광고 사태에 즈음하여 (1975. 1. 20)

성명서 – 국민투표에 대한 우리의 견해 (1975. 1. 23)

성명서 –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라 (1975. 1. 25)

성명서 – 양심선언 운동을 전개하며 (1975. 2. 3)

성명서 – 국민투표의 실태를 주시하면서 (1975. 2. 6)

성명서 – 국민투표에 대한 우리의 결의 (1975. 2. 10)

선언문 – 자유와 민주를 선언한다 (1975. 2. 12)

성명서 – 국민투표 결과와 난국의 수습에 관해 (1975. 2. 15)

성명서 – 누가 민주 헌정 질서를 파괴했는가? (1975. 2. 22)

선언문 – ‘민주국민헌장’과 강령 3장 (1975. 3. 1)

성명서 - ‘민주국민헌장’의 발표에 붙여 (1975. 3. 1)

성명서 – 인권회복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하며 (1975. 3. 3)

성명서 – 조선일보 기자들의 파면조치에 관하여 (1975. 3. 7)

성명서 – 언론에 대한 관권 압력을 규탄한다 (1975. 3. 13)

성명서 – 민주인사들에 대한 폭압사태를 중지하라 (1975. 4. 5)

성명서 – 고려대 휴교와 인혁당 인사들의 사형 집행을 규탄한다 (1975. 4. 10)

성명서 – 김상진 군의 의혈에 붙여 (1974. 4. 15)

성명서 – 김상진 군의 추도미사를 지내며 (1974. 4. 22)

성명서 – 김상진 군의 추도미사 방해에 대하여 (1975. 4. 23)

성명서 – 공포 분위기는 대화를 저해한다 (1975. 4. 30)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십자가 사형 틀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제는 사랑과 헌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상하좌우, 수직과 수평의 만남으로 하늘과 땅, 온 우주 만물을 포괄하는 보편성의 상징입니다. 민주회복국민회의 역시 고난을 감수하면서 각계각층이 힘을 포괄해 불의한 정부를 꾸짖고 구원의 정도를 제시했습니다. 그 일치와 연대, 협력 정신으로 분열된 오늘의 현실을 치유하고 극복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남북의 일치와 평화공존을 이룩해 주소서.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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