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의 교활한 속셈을 알아채시고 ‘왜 나의 속을 떠보는 거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다오’ 하셨다. 그들이 돈을 가져오자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마르코 12,14-17)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교회는 교회대로 왕들과 독재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성경 구절입니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향해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한 말이기도 합니다. 종교의 사회 비판적 기능을 애써 거부하며 궤변의 근거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독재 정권의 불법을 정당화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로마 황제 카이사르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인 한 인간일 뿐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은 황제의 것이므로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태어난 황제는 하느님의 몫이니 마땅히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느님께 귀속되어야 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정치는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아름다운 봉사와 예술이어야 합니다. 정치는 공동선에 근거하고, 공동선을 지향하고, 공동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공동선은 개인의 이득과 욕심을 넘어선 공동체의 공유 가치입니다. 인간의 기본 덕목은 이웃에 대한 배려이며, 종교의 근본 덕목은 극기와 사랑입니다. 이러한 도덕적 · 종교적 원리를 기초로 정치사회공동체가 작동합니다.
헌법 제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이 헌법을 유린했습니다. 4·19혁명을 통해 그 상처를 치유하려던 순간, 박정희 육군 소장이 군사반란과 삼중의 배신으로 민주주의를 짓밟았습니다. 그 후 두 번이나 대통령을 연임하고 다시 불법으로 헌법을 개정해 3선 연임을 했습니다. 그러다 아예 대통령 종신직을 기획하며 불법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유령과도 같은 유신헌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과 박정희의 연이은 불법과 억압 통치에 맞서 청년 학생을 비롯한 국민 개개인은 한층 굳센 힘을 다졌습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항일 독립투쟁의 정신을 일깨웠고, 각계각층의 국민은 한목소리로 유신헌법 철폐를 외쳤습니다. 온 나라가 감옥이니, 감옥 탈출을 위한 민주 대행진이 시작된 것입니다. 부활을 향한 십자가 고난의 길목에서 온 겨레가 더욱 깊이 민주주의의 고귀함을 깨닫고 성숙하게 된 계기입니다.
저는 유신헌법이 공표되었다는 소식을 로마에서 들었습니다. ‘유신’이란 말부터 엄청난 거부감이 일었습니다. 1868년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는 늘 일본을 동경하고 추종한, 뼛속까지 친일인 인물입니다. 유신헌법은 박정희가 자신의 실체를 스스로 고백한 선언이라 생각합니다.
4·19혁명으로 탄생한 정부는 단 9개월 만에 군홧발에 짓밟혔습니다. 무능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1963년 대통령에 취임한 지 10년 만에 유신헌법이라는 무지막지한 통치 도구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자신이 무능했음을 실토하는 것이 아닐까요? 박정희는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자신의 ‘공약’을 저버렸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지킬 생각도 없었습니다.
1971년 이후락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을 갖고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남북 평화 공존의 기초를 놓은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남북 양쪽의 검은 속셈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공동성명 이후에 북한은 김일성 수령 1인 독재 체제가, 남한은 유신독재 체제가 공고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뒷거래란 의심을 지우기 힘듭니다.
미국에서 해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1972년 유신체제를 발표하기 며칠 전 중앙정보부가 두어 차례나 북한의 박성철과 김성주에게 구체적 내용을 통보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곧 정치 변혁이 있을 터인데 그것은 내부 문제이고 북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란 내용입니다. 남과 북의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이념도 민족도 아닌 자신의 정권욕이었습니다. 이는 매우 가슴 아픈 지점입니다.
유신헌법이란 무리수는 박정희의 두려움에서 출발했습니다. 1971년 3선 개헌 이후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또한 전국적인 부정선거, 관권선거를 저질렀지만, 국회 의석은 민주공화당 183석, 신민당 89석으로 개헌 저지선이 무너졌습니다. 1972년 박정희는 위수령과 휴교령을 발동하고 특별조치법을 통과시킵니다. 일련의 유신 전(前) 단계 조치입니다. 같은 해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정치를 금하는 계엄령에 준하는 조처를 한 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발표합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 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4·19의거 및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하는 유신헌법 전문은 뻔뻔함의 극치이자, 군사반란으로 4·19정신을 파괴한 자들의 자기 부정입니다.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와 연임 제한 철폐에 그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의회 민주주의에서는 불가능한 막강한 권한을 부여합니다.
국회의원 추천권,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 법관 임명권, 법률 거부권 등입니다. 국민의 기본권은 축소되었고,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는 조항도 삭제됩니다. 대통령은 삼권 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 존재가 됩니다. 유신헌법에 관여했던 헌법학자와 교수들이 바로 독재 정권의 조력 범죄자들입니다.
박정희 영구집권 위한 유신헌법
젊은 검사 김기춘이 초안 마련 뒤
헌법학자 한태연과 갈봉근이 부역
곡학아세 조롱 받은 교훈 새겨야
젊은 검사 김기춘이 유신헌법의 초안을 마련했고, 당대 최고의 헌법학자로 칭송받던 한태연과 갈봉근이 박정희의 영구 집권 계획에 부역했습니다. 한때 유신헌법은 두 학자의 이름을 따서 ‘한갈이 헌법’이라고 불립니다. 한태연 교수는 유신헌법에 대해 드골 헌법을 차용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를 구현한 것이라 변명했습니다. 드골이 통탄할 일입니다. 지식인이 자신의 양심을 팽개치면 이런 참담한 결과가 초래됩니다. 역사의 악당은 별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존중하던 지식인들이 얼굴을 바꿔서 민중을 탄압하고 독재에 앞장섰습니다.
유신헌법이 악랄한 것은 반대를 원천 봉쇄했다는 점입니다. 유신헌법을 수정하자고 건의하는 것도 위헌입니다. 하지만 학생, 시민들은 오래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유신 철폐, 파쇼정치 철폐, 중앙정보부 철폐, DJ(김대중) 납치 진상 해명’을 외쳤습니다. 경북대가 서울대 시위를 이어받으면서 전국의 대학과 시민사회, 종교계 등에서 유신 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1973년 12월에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장준하, 함석헌, 천관우, 계훈제, 백기완, 김수환 추기경 등이 참여했습니다. 유신헌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조차 불법이었기에 이 운동의 정식 명칭은 ‘현행 헌법 개정 청원운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박정희는 담화문을 발표해 불순한 행동을 중지하라고 협박했지만, 서명운동은 10일 만에 30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뜨겁게 불타오릅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합니다. 유신헌법에 대한 비난, 개정이나 폐지하자는 주장과 청원은 물론 이를 보도하는 행위도 금했습니다.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 두 분은 긴급조치 1호의 최초 구속자입니다. 서명운동이 전국민적 호응을 끌어냈지만, 공권력을 가장한 폭력 앞에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긴급조치는 4호까지 이어지면서 언론에 재갈을 물렸고, 독재 권력에 항거하는 학생과 시민들을 갖은 방법으로 탄압했습니다.
역사는 잔인할 정도로 정확합니다. 존재했던 과거는 저절로 지워지지 않고, 모든 희망과 변화는 대가를 요구합니다. 제가 역사 기도를 쓰면서 잘못된 과거의 청산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유신헌법이 알려주는 역사의 교훈은 명확합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 부역, 이승만 독재 정권의 잔재들이 박정희 유신체제의 모태가 되었고, 그것은 다시 전두환 군부 독재를 불러냈습니다. 2022년에도 그 후예들이 이름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고는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다른 모습, 더 교묘한 수단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역사와 온 국민을 속이며 민족의 평화와 공존을 해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류를 자처하는 수구 언론도 그 공범입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송건호 선생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면서 “모든 일의 시작은 청년 학생이었다”라고 일갈했습니다. 청년, 학생이 살아나야 역사의 정통성이 바로 섭니다. 청년, 학생이 좌절하고 뒤로 물러앉은 세상에 희망은 없습니다. 청년, 학생들이 오늘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역사가 다시는 질곡에 빠지지 않도록 불의한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는 길을 선택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청년과 학생들이 자신 앞에 놓인 역사의 소명을 인식하고 민족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 주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저희 모두가 언제나 주님의 거룩함을 간직하고 정의롭게 살도록 이끌어 주소서. 늘 양심과 법에 따라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바른 삶을 살게 해주소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당당하게 응답하며 불의한 제도와 정치를 개선하고 개혁해, 아름답고 참된 민주주의 공동체를 이룩하게 해주소서. 온갖 간악한 무리를 퇴치해 주시고 남북평화 일치를 앞당겨 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