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6) 5·16 군사 반란
“경제만 떼 박정희 평가 안 돼죠”
“고문으로 숨진 청년학생과 가족을
경부고속도로가 위로하지 못하고
짓밟힌 인권과 민주주의를
100억불 수출탑이 보상 못하잖아요”
(16) 5·16 군사 반란
“경제만 떼 박정희 평가 안 돼죠”
“고문으로 숨진 청년학생과 가족을
경부고속도로가 위로하지 못하고
짓밟힌 인권과 민주주의를
100억불 수출탑이 보상 못하잖아요”
수녀원 원장의 안타까운 거짓 답변 5·16을 혁명이라고 부르던 시절, 저는 그것이 혁명에 대한 지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군사 정변(政變)이라는 언뜻 들으면 가치 중립적인 듯 보이는 점잖은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저는 단연코 5·16은 ‘군사 반란’이라고 규정합니다. 로마 유학 시절, 저는 이 점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 시절 “너는 어디에서 왔니?”라는 외국 친구들의 질문에 “나는 한국에서 왔다”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즉시 “아! 그 쿠데타의 나라?”라는 대꾸가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말 속에는 은연중에 우리나라를 얕잡아 보는 느낌이 담겨 있었습니다. 마치 쿠데타나 일어나는 미개한 나라라는 듯이. 저는 가슴이 시리고 치욕스러웠습니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을사늑약처럼 우리 민족사의 씻을 수 없는 죄악이자 수치입니다. 장면 내각은 보는 관점에 따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최고의 자유 국가를 구가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결국 사회적 분열과 혼란으로 군사 쿠데타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사임 후 장면 내각은 불과 9개월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1공수특전단, 제1해병여단, 6군단 포병대 등이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했습니다. 당시 장면 총리는 소공동 반도호텔 809호를 공관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서너 시쯤 공관 인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장면 총리는 피신을 위해 미 대사관과 유엔사령부 등을 돌아다녔지만, 그 어느 곳의 문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새벽 5시쯤 가톨릭 신자였던 장면 총리는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피신합니다. 장면 총리가 몸을 피하고 잠시 후 총리 공관에 들이닥친 박정희는 쿠데타가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결론적으로 쿠데타가 일어나고 단 3일 만에 박정희에게 정권이 이양된 것입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어쩌면 쿠데타를 막을 수도 있었던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을 알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우선 장면 총리는 경찰 첩보로 일부 군인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음을 오래전에 알았다고 합니다. 반란 일주일 전에는 매우 구체적으로 박정희 육군 소장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정보도 받습니다. 하지만,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그때마다 “모략이다. 미군이 있는데 말도 안 된다”라며 얼버무리며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 미국은 어떠했을까요? 쿠데타를 뒤늦게 알아차린 미 대사가 총리의 피신처를 알기 위해 노기남 주교에게 연락합니다. 그런데 당시 가르멜 수녀원 프랑스인 원장은 주교의 확인 전화에도 불구하고 총리가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만일 그때 미 대사와 장면 총리가 즉시 만났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주한 미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는 함부로 군을 움직인 박정희에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전시뿐 아니라 평시 작전권도 미군에 있을 때입니다. 그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쿠데타 진압을 자청했지만, 웬일인지 윤보선 대통령은 그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경무대에 쿠데타군이 들이닥치자 “올 것이 왔구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_______
장면 총리가 진짜 잘못한 것은 제2공화국은 출발부터 삐걱거렸습니다. 의원내각제에서 민주당의 구파를 대표하는 윤보선 대통령과 신파를 대표하는 장면 총리 체제가 갖춰졌기 때문입니다. 신·구파는 서로를 불신했고, 사사건건 부딪쳤습니다. 그 깊은 증오의 골을 박정희가 파고든 것입니다. 이후 미 국무부도 불개입 원칙을 견지하며 방관자 입장으로 돌아섭니다. 미국은 승자의 편을 들 뿐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미국이 친일 세력을 두둔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친일파가 친미주의자가 될 테니까요. 장면 총리는 피신 55시간 만에 가르멜 수녀원에서 나와 쿠데타를 인정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합니다. 허무할 정도로 쉬운 쿠데타였습니다. 장면 총리에 대한 저의 평가에는 애증이 모두 담깁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우리는 신학생 시절, 매일 미사 중에 장면 정부의 성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품과 신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1970년대 감옥에 있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은 목숨을 걸고 이를 지켜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장면 총리는 이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에 이후 수많은 시민과 청년 학생이 큰 희생을 치르게 합니다. 당시 저는 천주교 사제로서, 또한 같은 신앙인으로서 이분이 자신의 정치적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보속한다고 생각하며 아픈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사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일왕에게 충성 혈서를 씁니다. 민족에 대한 첫 번째 배반입니다. 그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의 주력부대인 관동군의 견습사관을 거쳐 관동군 보조부대인 만주군의 소위와 중위로 복무합니다. 그런 그가 해방 후에는 광복군이라고 주장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해방 후 그는 국군 창설에 관여해 대위로 임관합니다. 48년에 여순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동료 명단을 주고 자신은 사형을 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민족과 동지에 대한 두 번째 배반입니다. 그는 쿠데타 후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했습니다. 쿠데타가 불가피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내건 ‘혁명공약’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민족과 공동체에 대한 세 번째 배반입니다. 혁명공약의 여섯 개 항목 중 마지막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겠다”입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정변으로 영구집권을 꾀합니다. 그는 위헌적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제3공화국 헌법을 정지했습니다. 1974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 연설에서 그는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과 민족과 역사에 대한 영원한 배반입니다. 마침내 그는 동료이자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의로운 결단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_______
엄정한 평가로 잘못된 역사의 고리 끊어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엇갈립니다. 경제 분야의 업적만은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분연히 반대합니다. 어떤 명분을 갖다 붙여도 3선 개헌과 유신헌법,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수많은 청년 학생, 시민들에게 가한 폭압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5·16은 군사 반란이자 민족사의 치욕입니다. 4·19 불사조 정신을 총칼과 군홧발로 짓밟은 박정희는 독재자 이승만의 후계자이고, 독재자 전두환의 선임자일 뿐입니다. 친일 잔재와 이승만 독재, 유신 독재의 청산이 우리 시대 성숙한 시민들이 해야 할 역사적 책무입니다. 지나간 과거사라고 해서 조금도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경부고속도로가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청년 학생, 시민들과 그 유가족들을 위로해주지 않습니다. 100억 달러 수출탑이 짓밟힌 인권과 민주주의를 보상해 주지도 않습니다. 성장 지상주의의 깃발 아래 노동 착취, 빈부 격차, 지역감정과 같은 값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는 숨죽이며 군사 정권의 만행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 ‘문민정부’라고 불렸습니다. 군인이 아닌 일반인 출신의 대통령이 통치하는 정부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서글픈 단어입니다. 그 후로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후대를 위해 5·16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만이 잘못된 역사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죄의 뿌리를 잘라내는 일, 그것이 바로 역사 기도이고 민족적 성찰입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반복해 올립니다. 배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그리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저희 모두의 회개를 청하며 보속과 속죄의 기도를 올립니다. 하느님, 저희 모두 새로 태어나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깨우쳐 주시고 민족의 일치와 평화 공존을 위해 몸 바치게 해 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