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성실하던 마을이 창녀가 되었는가!
법이 살아있고 정의가 깃들이던 곳이
살인자들의 천지가 되었는가!
너의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는 물이 섞여 싱거워졌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반역자요, 도둑의 무리가 되었다.
모두 뇌물에만 마음이 있고 선물에만 생각이 있어
고아의 인권을 짓밟고 과부의 송사를 외면한다.”
(공동번역 이사야 1,22-23)
2600여 년 전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왕국이 창녀 꼴이 되었다’라고 통곡합니다. 여기서 창녀란 하느님을 떠난 종교적 배신을 뜻합니다. 오늘날 여성학자들은 이것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시각이라고 날 선 비판을 합니다. 이제 남녀평등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해 봅니다. “어쩌다가 성실하던 마을이 민족과 양심까지 팔아넘긴 배신자가 되었는가!”
그렇습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신뢰에 기초해야 하고, 이는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뢰, 공정, 정의는 종교적 덕목이며, 사회 공동체의 근본 가치입니다. 양심에 기초해, 법과 정의를 지켜야 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듯 우리도 완전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힘들지만, 우리가 노력하고 하느님이 도와주시면 가능하다고 설파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며, 그리스도교의 원리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살인자들이 범람하고, 죄가 난무합니다. 변절자, 반역자, 도둑, 탐관오리가 득시글하고, 고아와 과부를 외면하는 불신이 만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 시대의 사회상입니다.
유다 현실은 우리네 현실과 판박이입니다. 이 불의한 현실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느님의 보복, 곧 심판입니다. 잘못을 씻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바로 성경의 역사관, 정의의 심판론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이 세상은 늘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우뚝 서 있는 모순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15,14)
권력과 금권, 불법과 거짓이 난무합니다. 이를 이길 수 있는 비법은 오직 양심에 기초한 정직과 하늘에 의탁하는 용기입니다. 정직과 용기, 이 두 덕목이 자아실현과 자기 초월을 이루는 발판입니다. 정직이란 양심의 확인이며, 용기는 실천하는 힘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응답한 박재표 순경
여기 한 청년의 기막힌 사연이 있습니다. 박재표 순경입니다. 1956년 정읍군 소성지서에서 근무하던 스물다섯 살의 박재표 순경은 이승만 독재 정권의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는 실마리 역할을 했습니다. 이름하여 1956년 ‘정읍 환표 사건’입니다.
1956년 8월13일 제2대 지방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박 순경은 8월13일 소성면 제1투표소(소성초등학교)의 경비로 배치되어 투표 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투표가 끝난 후 투표함을 소성면사무소로 옮겼고, 곧이어 본서에서 보낸 트럭에 투표함을 싣고 정읍군 선관위의 개표장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돌연 트럭이 멈춰 섰습니다. 트럭 뒤에서 따라오던 호송 경비 담당 사복 경찰관은 차가 고장 났으니 수리하는 동안 막걸리나 한잔 하자며 선거 종사원들을 데리고 술집으로 갔습니다. 그 후 트럭에 탄 본서 형사들에 의해 환표 부정이 이루어집니다. 소성면 투표함 3개 중 2개의 봉함서를 뜯고 투표함 속의 투표용지를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결국 도의원 선거에서 10,126표를 얻은 자유당 후보가 9,727표를 얻은 민주당 후보를 제치고 도의원에 당선됩니다. 환표가 이루어진 것은 제1투표함과 제3투표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고가 나지 않은 제2투표함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전체 1,335표 중 자유당 의원이 획득한 것은 단 306표였습니다.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졌다’라는 당시의 유행어 그대로였습니다.
박 순경은 환표가 이루어진 트럭 안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본서 형사들의 강요에 환표를 거들기까지 했습니다. 눈앞에서 노골적으로 벌어진 부정행위에 대한 충격과 그에 가담했다는 참담함에 그는 괴로워했습니다. 마침내 박 순경은 8월26일 밤 남몰래 상경해 27일 기자회견을 엽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대서특필됩니다.
이승만 정권의 투표함 바꿔치기
말단 순경이 직 걸고 폭로 회견
그의 용기와 정의 정신 기려야
박재표 순경의 폭로를 보도한 <경향신문> 1956년 8월29일자.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박재표 순경의 폭로를 보도한 <동아일보> 1956년 8월29일자.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데 놀란 것이 아니라 스물다섯 살 청년의 용기와 결단에 놀랐습니다. 그것도 현직 경찰관의 양심선언이니 파장은 컸습니다. 저는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장기 독재와 부정부패로 민심은 이미 이승만 정권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자유당의 수족이 되어 움직였던 경찰과 공무원은 당연하다는 듯 선거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선거 실적에 따라 인사상 혜택을 주었으니, 선거 부정이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음은 사실상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박 순경은 자신의 직을 걸고 부정과 불의를 고발했습니다. 그는 직무유기죄로 구속되어 1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도대체 무슨 직무를 유기했다는 것일까요? 반면 부정선거로 당선된 자유당 도의원은 4년 임기를 다 채웠다고 합니다. 임기가 끝날 때까지 선거 소송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고발한 사람은 감옥에 가고, 불의의 장본인은 혜택을 누렸습니다.
경찰청 앞에 박재표 흉상을
박재표 순경은 출소 후 어떤 곳에도 취업할 수 없고, 어떤 일도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무자비한 감시하에 그의 가족은 물론 형제, 사촌, 조카들까지도 고통을 겪었으며, 1959년 대법원 최종 판결로 그의 폭로가 허위가 아니었음이 밝혀집니다. 1960년 4·19 직후 복직이 되어 종로경찰서 등에서 근무하다가 환표 사건을 폭로했던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경비, 자재부 등에서 일한 뒤 1990년 정년퇴직하게 됩니다. 그의 손녀딸이 <기독교방송(CBS)> 피디(PD)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려 왔습니다. 박 순경은 천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201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대를 넘어서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대접받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부정에 항거해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분들을 외면한다면 이런 일은 늘 반복될 것입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업보는 우리에게 원죄나 다름없습니다. 불의한 과거를 끊어내지 못하고 부정을 청산하지 못한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박재표 순경은 경찰의 표상, 민주시민의 모범입니다. 정직하고 용기 있는 실천가입니다. 경찰, 검찰, 법관 등 모두 가슴을 치고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아니, 우리 겨레 모두가 뉘우치고 이분을 새롭게 기억하길 바랍니다. 지금 경찰청 현관에는 김구 선생의 흉상이 있습니다. 그 옆에 박재표 순경의 흉상도 모셔야 합니다.
한국 경찰의 창립일은 1945년 10월21일, 미 군정 당시 경무국이 창설된 날입니다. 매우 부끄럽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 일본 경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제정된 그 날을 기념하는 것은 민족정신에 반합니다. 5·18 항쟁 당시 계엄군의 명령에 맞서 발포를 거부했던 안병하 치안감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박재표 순경을 경찰의 표상으로 모시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한국 경찰이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이 됩니다. 저는 박재표 순경이 부정선거를 고발한 8월27일을 경찰의 날, 경찰 부활의 날로 기념하기를 바랍니다.
그때의 부정선거는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미디어라는 형태로 정보를 왜곡하고 여론을 호도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양심을 무디게 합니다. 또한 무관심과 방관을 유도합니다. 2021년의 우리는 부정과 불의에 맞서 싸웠던 박재표 의인을 정성껏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 스스로 제2, 제3의 박재표가 되도록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민주와 평화는 늘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위에 꽃핍니다. 우리 모두 박재표 순경의 정직과 용기를 본받도록 다짐하며 온 겨레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정의로우신 하느님, 정직과 용기의 귀감인 박재표 순경을 기억하오니, 그와 함께 가족 모두를 축복하소서. 그리고 이 땅에 정의를 세워 주시고 저희 모두 정의와 평화의 사도가 되게 하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