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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못 살겠다 갈아보자’ 계승한 시대정신은 평화와 안녕

등록 2021-11-29 09:59수정 2021-11-29 10:29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9) 못 살겠다 갈아보자

이승만 독재에 맞선 도도한 민심
‘못살겠다 갈아보자’ 구호에 응축
이승만 후예가 누군지 잘 살펴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 포도가 웬 말인가?

만군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이사야 5,1-2.7)

이사야 예언자의 ‘포도밭 노래’는 우리네 대중가요 ‘청포도 사랑’을 연상케 합니다. 성서 작가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신뢰와 사랑을 포도밭에 비유해 시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지중해 연안 팔레스틴 지역에서 농사짓고 양 떼를 키우는 생활을 했던 히브리인들은 일상을 하느님과 연계해 묵상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씨 뿌리는 사람, 가라지, 겨자씨, 누룩, 보물과 진주, 그물, 나아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주 쉽게 풀이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늘 우리의 삶 안에 그리고 마음 안에 구체적으로 내재한다는 신선한 가르침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젊은 시절 포도밭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 체험을 바탕으로 유다 민족사를 하느님 안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포도원 주인은 땀 흘려 포도나무를 가꾸며 알찬 수확을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온통 들 포도(상품가치가 없는 야생 포도)가 열렸으니 얼마나 황망한 일입니까? 바르게 살지 못해 어긋난 우리의 행업이 그와 같다는 예언자의 고발이자 지적입니다.

신익희와 조봉암의 단일화 무산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빼앗긴 조국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토로했습니다. ‘님’을 결코 잊거나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희망의 미래, 재회의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꿈꾸던 ‘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더 큰 희망으로 민주주의라는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심고 가꿨습니다. 하지만, 4·3 제주항쟁, 제헌국회 프락치 사건, 사사오입 등 엉뚱하게 들 포도가 열렸습니다. “포도를 심었는데, 들 포도가 웬 말인가?”라는 울부짖음과 함성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못 살겠다 갈아보자’입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우리 헌정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정치 구호입니다. 1956년 당시 저는 중학생이었습니다. 남영동 삼거리에 있는 민주당 사무실 앞이 등하굣길이었는데, 어느 날 여성 당원이 외치는 처절한 구호를 들었습니다. 중학생인 저에게도 그 외침은 절절하게 다가왔습니다.

좋은 구호는 시대 정신을 담고 있으며, 가슴을 뜨겁게 하고 동시에 행동을 촉구합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가 바로 자유당 이승만 독재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고발이며 확실한 진단입니다.

사사오입 개헌과 우의마의 소동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 현상은 극에 달했습니다.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당의 정·부통령 후보가 선출되자, 자유당 비토와 민주당 지지라는 현상은 표면화되었습니다. 당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민주당은 신익희와 장면을, 진보당은 조봉암과 박기춘을 후보로 선출했습니다.

4월 11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의 첫 유세가 서울 수송초등학교에서 열렸는데 3만 명이 운집했습니다. 신익희는 이 자리에서 일당 독재를 타도하자고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개최된 정견 발표회에는 무려 20만 명이 운집하는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당시 서울역에서 한강까지 길게 행렬이 이어지고 전차와 버스가 초만원 사태를 빚었다고 합니다.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겠다는 국민적 열망은 간절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에 함축되어 있으며, 이 구호가 이승만 정권을 무릎 꿇게 한 결정적 몽둥이였습니다. 시대의 아픔이 담긴 구호는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억눌렀던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북돋웠고 무엇보다 행동하도록 촉구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자유당이었습니다. ‘갈아봤자 별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맞불 구호를 내세웠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대세는 이미 기운 듯했습니다. 민주당은 ‘이리조리 가지 말고 신작로로 가자’라는 또 하나의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이리조리’란 이승만과 조봉암을, ‘신작로’는 신익희와 장면을 말합니다. 즉, 자유당과 경쟁 관계의 진보당을 동시에 견제하는 구호였습니다.

60여 년 전에도 야권의 단일화는 뜨거운 논쟁거리였습니다. 신익희의 민주당과 조봉암의 진보당은 여러 차례 단일화 협상을 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민주당에서 ‘조봉암은 안 된다, 차라리 이승만을 찍어라’라는 말이 나왔다니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우리는 실수를 통해 배우려 하지 않고, 심지어 쉽게 망각합니다.

아무튼 1956년 대통령 선거는 야권으로서는 이길 수밖에 없는 선거였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선거를 열흘 앞둔 5월 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이리(익산)행 열차에서 뇌출혈(혹은 심장마비)로 급서한 것입니다. 한강 백사장 유세로부터 불과 사흘 뒤입니다. 온 나라가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아, 우리 민족이 불운한 것일까요, 이승만이 지독히도 운이 좋은 것일까요? 유력한 후보가 사망한 상태에서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당선됩니다. 남녀노소,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부르짖었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그렇게 무위로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거대한 민의의 흐름이 어떻게 이승만을 당선시켰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경찰과 관을 동원해 선거 운동을 했을 뿐 아니라 표 바꿔치기 등 대대적인 개표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진보당의 조봉암은 유효표 900만 표 중 216만 표를 얻었습니다. 자유당으로서는 싹을 잘라야 했습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1958년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체포해 이듬해 사형을 집행합니다. 사실상 패배한 선거, 민심이 등 돌린 상황에서 폭주한 자유당 정권은 4·19 혁명으로 막을 내립니다. 더구나 2011년 1월 20일 조봉암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 선고함으로써 이승만의 불의와 악행은 더욱 명백하게 온 천하와 역사 앞에 드러났습니다.

독재 항거한 의인들 뜻 이어야

내년 3월의 대통령 선거를 석 달여 앞둔 지금, 우리는 ‘못 살겠다’가 아닌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욱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불의로 판명 난 이승만 독재를 계승한 자들이 누구인지, 조봉암을 살해한 후예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무리는 지금도 여전히 국가보안법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불법에 가담한 검찰과 법관들의 죄도 물어야 합니다. 나아가 바른 역사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로 독재 정권에 항거했던 의인들과 투사들의 뜻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 교훈을 통해 청년 학생들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민족 공동체의 평화 보장을 위해 전쟁 종식 선언과 함께 자주국방과 자주 외교를 정립해야 합니다. 환경 정화와 지구 살리기 등 과감한 기후정책을 통해 세계인과 함께 평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거짓 언론을 퇴치하고 진실과 정의에 기초한 바른 언론 문화를 창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조들의 고귀한 뜻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으며 억눌러도 다시 튀어 오르는 것이 시대정신입니다. 우리 정치가 그 시대정신이 가리키는 공동선에 기초해 아름답게 전진하기를, 우리 민족에게 평화와 안녕이 깃들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저희 모두 참되게 힘을 모아 남북 공동체가 알찬 포도송이를 맺게 해주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을 간직하며 늘 하느님과 일치해 저희와 후손 모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소서, 아멘! 선열들이여, 하늘에서 도와주소서,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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