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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맥아더 존경한다” 했다가 미국 신부님께 혼난 까닭

등록 2021-10-18 10:59수정 2021-10-19 16:23

[기획]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맥아더 포고령
어릴 시절 나의 영웅이었던 맥아더 장군
“자네가 뭘 알아? 전쟁만 아는 인간인데”
미국 신부님 비판받은 뒤에야 바로 대면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탈출기 22,20)

약자와 이방인의 삶을 보장하라는 성경 말씀입니다. 그 핵심은 자기 성찰과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오 7,32)라는 황금률이 바로 율법의 정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며 이들의 모임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역사적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고 허물이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는 잘못된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위한 쇄신으로 세상을 향한 개방적 사목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회개란 자신과 세상을 바꾸어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노력과 다짐입니다.

저는 교회의 사목적 소명을 깨닫는 과정에서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사도 바오로가 현대 미국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읽게 되었습니다. 킹 목사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가식과 위선의 삶을 사는 미국인들을 무섭게 꾸짖습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하느님, 하느님!’을 부르짖고, 더군다나 달러화 동전과 지폐에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IN GOD WE TRUST)’라는 신앙고백까지 넣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의 영웅은 맥아더 장군입니다. 약자인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었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선글라스에 파이프를 문 모습도 얼마나 멋졌는지 모릅니다. 선생님들도 맥아더 장군이 우리를 구했다 했습니다. ‘그가 조금 더 힘을 내어 만주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면 우리 민족이 분단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1957년 신학교에 진학하여 캐나다 유학을 다녀온 신부님으로부터 영어를 배우는데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패전국인 일본보다 훨씬 더 나쁜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미8군 주둔 기지를 우리에게서 거의 공짜로 쓰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순간 ‘미국이 고맙기만 한 나라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미국 아닌 맥아더가 관할한 미군정

청년이 되어 로마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로마에서 8년을 살면서 내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믿기 어려웠지만, 미국은 우리 민족이 피 흘린 전쟁에서 큰 이득을 취했습니다. 미국은 우리 편이 아니었습니다.

1971년으로 기억합니다. 미국에서 본당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우연히 ‘맥아더를 존경한다’라는 얘길 꺼냈습니다. 신부님은 매우 의아해하면서 “자네가 뭘 알아서? 그 전쟁만 아는 인간을…. 세계 평화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신부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분명하게 깨우쳤습니다. 가슴 속 영웅을 내치기 어려워서, 저는 그동안 미국과 맥아더를 따로따로 분리해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1973년 귀국 후, 혹독한 유신 체제를 겪었습니다. 청년, 학생들이 속절없이 쓰러졌고, 여기저기서 ‘미국은 어디에 있느냐’라는 피울음이 들렸습니다. 비로소 저는 미국과 맥아더를 똑바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정의의 수호자가 아니었고, 맥아더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맥아더는 패전국의 관리를 맡은 미군이었을 뿐입니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신격화되어서는 안 될 것들이 신격화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들을 땅으로 끌어내려 찬찬히 살피고 재평가해야 합니다. ‘역사 기도’라는 이름 아래 붓글씨를 쓰면서 외국인의 이름을 쓴다는 게 불편했으나 결코 지나치거나 빠뜨릴 수 없었습니다. 꼭 풀어야 할 실마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맥아더 포고령’은 1945년 9월 11일 해방된 한반도에 미군이 들어오면서 발표한 통치 원칙입니다. 미군은 38도 이남을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포했고, 그동안 우리 한국인들이 이룩한 자주적 통치 활동을 전면 부인했습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말입니다.

얼마 전 정치권에서 해방 후 미군이 ‘주둔군이냐 점령군이냐’라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논쟁 자체가 민족의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을 거저 얻었습니다. 거저 얻었기에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주둔인지 점령인지를, 당한 사람이 논쟁한다는 것은 공허할 뿐입니다. 행위자의 의도와 태도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오큐파이(occupy)의 어원인 라틴어 오꾸빠레(occupare)는 점령이란 뜻이고, 당시 중앙청 앞에는 미국 국기만 올라갔습니다. 포고령 1조는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하에 집행된다’입니다. 맞습니다, 미국이 아니라 ‘나의 관할하(under my authority)’입니다. 포고령을 여러 번 읽었지만, 그 어디에도 주둔국 혹은 해방할 약자 나라에 대한 존중은 없었습니다.

친일세력 온존시킨 포고령 2조

이보다 더 뼈아픈 것은 포고령 2조입니다. ‘정부의 전 직원과 사용인 그리고 공공사업 기관의 직원과 사용인 등은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기능과 의무 수행을 계속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언뜻 보면 그럴듯해서 평온해 보이기까지 한 문장 속에는 비수가 숨겨져 있습니다. 친일파가 성공적으로 친미 세력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입니다. 일제를 돕고 자국민을 수탈하여 부와 명예를 거머쥔 친일 세력이 새로운 강자인 미국의 비호 아래 모든 것을 공고히 하였기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기득권층으로 군림하게 된 것입니다.

맥아더 포고령 이후, 한반도 상황을 누구는 미군정이라 하고 누구는 미식민지와 다를 바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주둔이냐 점령이냐’ 논쟁처럼, 단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그 시절을 극복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입니다.

1963년 8월 28일, 링컨 노예해방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 광장에서 있었던 킹 목사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언제나 세계인의 심금을 울립니다. 브라질의 정의평화 사도 헬더 까마라 대주교도 한 사람의 꿈이지만 만일 우리 모두 같은 꿈을 꾼다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현실이 된다고 민중을 격려했습니다.

제23회 한겨레 통일문화상 수상자 박한식 조지아대 명예교수는 수상 소감에서 “통일문화 없인 통일의 길을 볼 수 없다”라고 하며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안보 패러다임에서 평화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큰 꿈을 꾸고 그 큰 꿈을 실현하도록 사고를 전환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부활이고,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다”라는 문익환 목사의 명언을 되새깁니다.

나눔이 바로 민주주의 실현이며, 일그러진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 평화의 완결입니다.

선열들이여, 저희 모두 민족의 꿈인 남북의 일치와 평화공존을 이룩하도록 하늘에서 도와주소서. 아멘!

함세웅 신부.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한겨레> 누리집에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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