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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생각이 달라도 대의 위해 함께했더라면

등록 2021-10-11 08:59수정 2021-10-19 16:22

[한겨레S] 기획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해방후 자주 통일국가 수립 못하고
분단과 친일파 득세 등 잘못된 출발
여운형의 ‘민족화합’ 꿈 키워나가야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간 동포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카베오 2,41)

공동체의 생존이 율법과 전통보다 우선한다는 이 깨달음. 바로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복음 말씀과 상통하는 혁명적 선언입니다. 자각을 통해 혁명을 지향한 이들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습니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인 동시에 오늘과 내일을 위한 길잡이로 미래학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이며 새로운 미래가 물밀듯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앞서간 선조들의 뒤를 바라보며 성실하게 따라가는 삶을 자기완성과 구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선조들의 행업을 끊임없이 기려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과거와 미래를 함께 바라보는 성숙한 후손의 자세입니다. 기도와 기억은 인간이 지닌 초월적 힘이며, 이는 사랑과 헌신을 통해 확인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부터 ‘그때 그랬더라면’이라는 안타까운 가정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가정이든 한탄이든 망각하는 것보다는 백배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마저 드러내는 것 자체가 ‘역사 기도’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항일 독립운동은 신비롭다고 할 만큼 거침이 없었고, 또 그만큼 처절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죽음보다 가혹한 고통을 겪으며 자신들의 목숨조차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 사실을 반추하는 것은 헝클어진 실타래를 푸는 첫 단계로, 그 시작을 알아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달 만에 스러진 여운형의 꿈

항일 독립운동은 크게 4갈래로 나눕니다(조민 전 통일연구원 부원장 ‘항일 독립투쟁사’ 참조). 첫 번째는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한 무장 독립투쟁. 얼마 전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과 최운산 장군이 대표적입니다. 두 번째는 여운형, 송진우로 대변되는 국내 항일투쟁으로, 주로 언론활동에 집중했습니다. 세 번째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고, 네 번째는 미국 본토와 하와이, 쿠바 등 해외 독립운동으로 이승만과 김원용 등이 이끌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이 된 것은 앞에서 말한 4갈래 중 세 번째와 네 번째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소외되거나 스스로 방관했습니다. 최종 정치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총칼을 들고 만주벌의 추위에 떨었던 이들도 아니고, 국내에서 수없이 옥고를 치른 이들도 아니었습니다. 이승만은 그렇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국부란 별칭까지 얻었습니다. 실타래의 실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역사의 전개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입니다. 동족을 죽이는 전쟁을 겪었고 분단은 고착화가 되었으며, 전 국민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처단해야 할 친일파는 순식간에 다시 득세하고, 자자손손 부와 명예를 세습했습니다.

1944년 8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한 몽양 여운형 선생님은 지하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건국연맹’을 결성하고 3불(不)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말을 하지 않고(不言), 문서를 만들지 않고(不文),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不名)’라는 것입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여운형은 건국연맹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고,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를 만나 일본 측과 담판을 벌입니다. 일본이 요구한 일본인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는 대신 정치·경제범의 즉각 석방과 3개월분의 식량 보급, 건국 사업에 대한 간섭 배제 등을 조건으로 협상을 타결합니다.

여운형은 차근차근 중앙조직을 갖추어 나갑니다. 하지만, 당시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등으로 갈래갈래 나뉜 세력들이 하나로 뭉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8월 31일, 결국 좌우 통합이 좌절된 상태에서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에서 사임합니다. 9월 4일에 열린 확대위원회에서는 전국인민대표위원에 이승만, 여운형, 김구, 김성수 등 55명을 선출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킨 후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합니다. 따라서 9월 7일 건국준비위원회는 저절로 해체되었고, 9월 11일에는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총리에는 허헌이 각각 추대, 임명되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여운형은 테러의 표적이 되었고, 상해 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0월 10일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환국한 이승만도 주석 취임을 거절했습니다. 조선건국연맹으로부터 1년 2개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부터 두 달 만에 여운형의 꿈은 스러졌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저서 ‘한국 현대사 산책’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라고 말합니다. 해방의 기쁨은 찰나였고,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길고도 큰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상해 임시정부에만 기대했던 미숙한 판단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가정합니다. ‘생각이 다르더라도 대의를 위해 모두가 함께했더라면’이라고 가정합니다. 아쉽고 아쉽지만, 미완의 꿈은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민족화합이란 꽃을 미처 피우지 못했다고 그 씨앗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제2, 제3의 여운형이 되어야 할 이유

여운형 선생님은 ‘분단은 필히 전쟁을 초래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좌우합작과 갈등을 넘어서 하나 되는 민족을 염원했고, 늘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해방 공간을 사셨습니다. 막강한 냉전체제와 남북·좌우의 대립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자주 통일국가를 꿈꾸었던 선생님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반대 세력의 총격에 서거하셨습니다.

‘점령’이냐, ‘해방’이냐는 논쟁 안에 임의대로 역사적 사실을 골라 편집하고 좌우를 가르는 편견에서 이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민족공동체 구성원 누구도 민족분단과 좌우 갈등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권력을 움켜쥐려던 편협한 정치인들의 야합과 맥아더 연합군사령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제대로 논의해 볼 공간조차 만들지 못했습니다.

여운형 선생님에 대한 우리 사회공동체의 일그러진 편견은 여전히 존재하고, 이념으로 민족공동체 구성원을 나누고 갈등으로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무리 또한 상존합니다. 미군정 당시 하지 장군의 정치 자문으로 근무했던 버치(Leonard Bertsch) 중위는 보고서에서 선생님에 대한 일본 고위관료들의 평가를 기록했습니다. 서울대 박태균 교수가 이미 밝혔듯이 여운형 선생님은 당시 가장 존경받는 정치지도자였습니다.

바로 오늘 여기서, 우리 모두가 제2, 제3의 여운형이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선열들이여, 남북의 겨레가 하나 되도록 저희 모두를 재촉해주소서.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한겨레> 누리집에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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