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새하얘진 두 사람의 머리처럼 하얀 벚꽃이 활짝 핀 서울 마포구 토정로에 선 연극연출가 임영웅(왼쪽)씨와 번역가 오증자씨 부부. 부인이 번역한 연극을 남편이 연출하기를 53년째 이어오고 있는 이 부부는 한국 현대연극의 산실이 된 산울림 소극장을 운영하며 수많은 화제작과 스타 배우, 연출가를 배출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우리는 짝]
연극 연출 임영웅-불문학자 오증자
연극 연출 임영웅-불문학자 오증자
아내가 작품 골라 번역하면
남편이 무대에 올리기 50여년
집 헐어 산울림 소극장 짓고
함께 선보인 작품만 30여편 “직장 관두고 연극한다니 격려
아내에게 정말 고맙고 미안해요”
“남편은 내 작품에 손 안대요
작가 존중이 연출의 기본이래요” 이 두 사람에게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보다 어울리는 표현이 있을까? 지아비 부(夫)와 지어미 부(婦)의 순서를 정할 순 없지만. 아내가 좋은 작품을 골라 번역하면 남편이 연극으로 만들고, 남편이 극단과 극장 일로 빚을 지면 아내가 번역료와 저작료로 뒷감당을 하기를 50여년 세월. 연극계의 원로 연출가 임영웅(77)씨와 불문학자이자 이름난 번역가 오증자(78·서울여대 명예교수)씨 부부는 척박한 한국 연극판에서 전쟁 같은 삶을 함께 살아왔다. 연극을 모르는 사람도 그 이름은 아는 극단 산울림과 산울림 소극장은 이 부부의 또다른 분신이다. ‘살아 있는 한국 현대연극사’라고 할 법한 이 부부가 함께 만들고 키워온 산울림은 대중들을 울리고 웃긴 주옥같은 연극들의 고향이자 수많은 스타 배우, 연출가들의 산실로 한국 연극을 지켜왔다. 두 사람은 요즘 산울림 극장에서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아내 오씨가 늦깎이 극작가로 데뷔한 연극 <나의 황홀한 실종기>를 지난 12일 무대에 올린 것.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80살 여성이 주인공으로, 치매 환자도 마지막까지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연극을 올리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산울림 극단 창단 단원인 손숙(69)씨가 올해 연극 데뷔 50년을 맞은 것을 기념해 오씨가 처음 연극 대본을 쓰고, 최근 몸이 불편한 임씨가 애써 연출을 맡았다. 임씨는 여덟달 전 무대 계단에서 넘어져 척추를 다쳤다. 그래도 “다치고 난 다음에 첫 작품이 <나의 황홀한 실종기>인데, 역시 일을 하니까 건강해진 것 같다”며 웃는다. 연극으로 영원한 현역을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을 12일 서울 홍대 앞 산울림 소극장에서 만났다. “부부라기보다는 전우(戰友)였기에 가능했어. 한국 사회에서 연극을 한다는 것은 전쟁만큼이나 힘든 것 아니겠어요? 연극을 해서 돈도 안 생기고 돈만 쓰는 건데 그걸 하라고 격려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렇게 좋은 전우가 어디 있어요?” 남편 임씨가 대뜸 ‘전우’라는 말부터 꺼냈다. 같이 피를 흘리고 싸워온 동료, 그에게 아내 오증자씨는 그런 사람이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오 교수에겐 미안하다는 것만으로는 표현이 안 됩니다. 그러니 전우일 수밖에.” 그러면서 아내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아내 오씨도 맞장구를 친다. “임 선생과 저는 죽기살기로 연극을 해왔어요. 50여년 세월을 서로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공감하면서 살아온 거죠.” 어찌 두 부부의 생각이 각본을 짠 듯이 똑같을까? 그래서 ‘이심전심’이요 ‘부창부수’인가 보다. 부부가 ‘전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실로 오래전의 일이다. 1975년, 산울림 소극장 개관 5주년 기념파티 때였다고 오씨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임 선생이 ‘혼자서는 연극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전우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다음부터 임 선생이 결혼식 주례를 설 때마다 ‘부부는 전우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왜 신랑 신부한테 처음부터 그렇게 극심한 긴장감을 주느냐’고 했더니 ‘모든 부부가 그런 정신 무장을 하지 않으면 이런 험한 세상을 살기가 어렵지’라고 하잖아요. 자기가 연극 하는 게 그렇게 힘드니까 그랬나 봐요.” 두 사람이 부부와 전우라는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인터뷰’였다. 1959년 임씨가 한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시절 국제방송의 불어방송 작가 겸 아나운서인 오씨를 인터뷰하면서 처음 만났다. “제가 그때 국제방송을 시리즈로 취재했는데 한눈에 아주 멋있는 여성이었어요.” 남편은 한껏 추켜세웠는데 아내는 “그냥 평범한 남자였다”며 웃었다. “제가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나 문학, 책 이야기를 하면서 가까워졌어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5월,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군사 쿠데타로 사회 전체가 불안하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5월22일에 결혼했는데 저녁 7시부터 통행금지였고, 결혼식도 집회허가를 받아야 했어요. 은행에서도 개인별로 5000원밖에 찾을 수 없어서 정말 어렵게 결혼을 했습니다. 주변에 제대로 연락도 못하고 얼떨결에 결혼식을 올린 거죠. 수십년 후에 한 지인이 왜 비밀로 했느냐고 물어봤을 정도였습니다. 결혼식 때 소설가인 고 최정희 선생이 가난해서 축의금 대신 편지를 보내셨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나요.”
오씨는 “결혼도 힘들게 했지만 그다음 연극을 했으니까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털어놓고는 밝게 웃었다. 남편이 결혼을 한 뒤 신문 기자를 그만두고 연극판에 뛰어든 것이다. 휘문고 시절부터 연극에 빠져 있던 임씨는 1955년 서라벌예대 재학 당시 동랑 유치진의 <사육신>으로 연출가로 데뷔했을 만큼 연극에 대한 열정이 컸다. 그는 그 후 방송 드라마 피디를 거쳐 1966년 예그린악단 창단 공연으로 한국 창작 뮤지컬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살짜기 옵서예>를 올리며 첫 성공을 거둔다. 얼마 뒤 국립극단에서도 연출가로 데뷔하면서 본격적인 연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연극을 하지 않고 있으면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연극을 하는 거죠. 그런데 연극을 해서는 생활이 안 되니까, 그래서 돈은 벌어야겠고 연극 공부에 도움이 되고 직장이 되는 게 뭘까 찾아서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들어간 거였어요.”
가난했던 그 시절에 번듯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연극을 하겠다고 결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부인 오씨는 남편의 말에 두말 않고 “그렇게 하시라”고 동의했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같은 운명이로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고마웠죠.”
오씨는 “그때 제가 이화여고 불어선생을 해서 확실한 직장이 있고, 저도 뭘 몰라서 겁없이 도전했는데 연극인의 삶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1970년 김성옥, 함현진, 김무생, 김용림, 사미자, 윤여정, 윤소정, 손숙, 최선자씨 등을 창립 멤버로 모아서 산울림 극단을 창단했다. 오씨는 이화여고에서 11년간 교편을 잡은 뒤 출판사 샘터의 주간을 거쳐 1982년부터 서울여대 불문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극단의 뒷바라지를 떠맡았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85년 오씨는 남편이 극장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자 자택을 헐어 산울림 소극장의 문을 열자고 제안했다. 우리 연극사에서 개인이 연극 전용으로 지은 첫번째 극장의 출발이었다.
산울림 소극장은 오씨가 번역하고 임씨가 연출한 한국 최장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둥지이자, 수많은 화제작과 남녀 배우, 연출가들을 배출한 ‘연극 학교’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위기의 여자>, 쥘 르나르의 <홍당무>, 다리오 포의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 드니즈 샬렘의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테레사의 꿈>, 장 므노의 <우리, 테오와 빈센트 반 고흐> 등 30여편의 작품이 아내 오씨의 번역과 남편 임씨의 솜씨로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임씨는 공연보다도 좋은 배우와 젊은 연출가들을 양성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산이자 보람이라고 지난 세월을 회고했다. “나는 교육적인 의미로 연극을 해요. 기초 없이 하는 배우들도 많거든요. 연출을 꼼꼼하게 하고 연습을 호되게 시키는데 우리 극단을 거치면 기초가 있기 때문에 어디에 가든 잘합니다. 그런 걸 보면 우리가 헛일을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내에 대한 고마움도 빠뜨리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산울림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오 교수가 번역한 작품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해요.”
“첫번째로는 번역료를 안 받고, 두번째로는 좋은 작품을 골라주고, 세번째로는 대본을 고쳐도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요?” 오씨의 말에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함께 작품을 하면서 다툴 일은 없었다고 한다. 흔히 연출가와 작가는 공연 연습과정에서 대본 때문에 다투곤 하는데 임 연출가는 거의 대본에 손을 대지 않아 작가들이 좋아한다. 오씨는 “임 선생은 ‘연출의 기본이 작가의 작품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고칠 곳이 있으면 내가 미리 고친다”고 귀띔했다.
“오 교수는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야. 나는 감성적이고. 결국 양보하는 쪽은 이성적인 쪽이지. 그러니까 다툼이 없어요. 오 교수는 기본적으로 저한테 ‘상식적인 남편’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기대치가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문제가 생기겠죠. 그러니까 전우인 거예요. 저 사람이 옆에 없었으면 내가 여기까지 못 온 거지.”
좋은 연극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가면서도 극단과 극장을 운영하는 것은 실로 고행이었다. 빚에 시달리다 못해 언젠가 한번은 “극장을 폭파하자”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다시 용기를 내서 꿋꿋이 이어간 것은 산울림 소극장이 두 사람만의 극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저희가 이 극장을 포기하면 저를 바라보는 후배들은 더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임영웅)
“30년까지는 해보자고 했어요. 앞으로 2년 정도 버텨보고 자식들(아들 임수현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와 딸 임수진씨)에게 떠넘길 계획이에요.”(오증자)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산울림 소극장의 간판이 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절로 떠올랐다. 연극 제목처럼 오지 않는 그 무언가를 기다리듯 두 사람이 버텨올 수 있었던 힘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봐야 별 소용이 없겠지만 다만 저는 난관에 부딪혔을 때 ‘나는 왜 연극을 했느냐?’ ‘왜 아직 연극을 하고 있느냐?’를 생각해요. 앞서 말했듯 연극을 안 하면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안 드니까. 살아 있는 것을 한다는 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임영웅)
“저는 원래 연극을 한 사람은 아니지만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아주 날것이란 점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래요. 어느 지인이 제게 ‘다른 것은 다 남는데 연극은 없어진다. 그런데 왜 하느냐’고 물은 적도 있었어요. 저는 오히려 날것으로 순간순간 생명을 사는 게 매력인 것 같아요. 임 선생과 50년 넘게 하다 보니까 그런 걸 체득하게 된 거죠.”(오증자)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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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웅·오증자씨 부부가 무대에 올린 한국 최장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왼쪽). 현재 산울림 소극장에서 공연중인 <나의 황홀한 실종기>는 오씨의 극작가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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