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사장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인근에 핀 꽃을 보더니 세상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파묻고 향기를 맡는다.
“아~ 꽃내음 너무 좋아. 난 왜 꽃을 보면 뭉클해지지?” 검은 피부와 우락부락한 몸을 갖춘 전직 조폭 보스 ‘황철범’한테 소녀 감성이라니. “귀여운 거 보면 환장해요. 강아지도 너무 좋아하고, 아기 좋아하고, 라이언 같은 피규어 보면 막 사고 싶고.” 시작부터 예상을 깨는 황 사장, 아니 고준이다.
그는 드라마에서도 예상을 깼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열혈사제>(에스비에스)에서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투박하고 거친 황철범을 본모습처럼 소화해냈다. <미스티>(제이티비시)의 ‘케빈 리’에게 빠졌던 시청자들은 깜짝 놀랐다. ‘고혜란’(김남주)한테 저돌적으로 다가가던 케빈 리는 ‘어른 섹시’라는 별명까지 만들어내며 ‘세련되고 섹시한 남자’로 사랑받았다. “대체 ‘어른 섹시’가 뭐예요. 난 정말 모르겠네. 하하하. 어쨌든 작품마다 (캐릭터) 차이가 크면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배우는 나를 알리는 게 아니고 캐릭터를 알리는 직업이잖아요. 동일 인물 맞느냐는 평가가 나온다는 건 잘 소화했다는 뜻 아닐까요?”
그래서 <열혈사제>로 고준을 안 뒤 <미스티>를 다시보기 하는 시청자들은 케빈 리의 버터 바른 대사마저 사투리로 들리는 환청을 경험한다. 황 사장 캐릭터가 너무 강했던 게 걱정되지 않냐고 물으니 덤덤하게 답했다. “앞으로 난 더 보여줄 게 많고 그걸 충분히 깰 수 있다고 믿어요. 오히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저 자신이 기대됩니다.”
자신을 향한 인기에도 우려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오랜 내공 덕이다. <미스티>로 주목받고 <열혈사제>로 스타덤에 오르니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한 듯 보이지만, 그는 ‘이 바닥’에서 19년 동안 단역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 서울예대를 나와 오랫동안 연극, 독립영화 등에 출연했고 상업작품은 2001년 영화 <와니와 준하>로 데뷔했다. 영화 <과속스캔들>(2008)과 <써니>(2011) 등에서 작은 역할을 맡다가 영화 <타짜-신의 손>(2014)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굿 와이프>(2016), <구해줘>(2017) 등에 나왔다.
오랜 세월. 당연히 힘든 시간이 있었다. “20대 때 한번 그만두기도 했어요. 하지만 연기하지 않는 삶은 죽은 거 같아서, 행복하지 않아서 3개월 만에 돌아왔어요. 데뷔하고 4년이 지났을 즈음인가, 오디션을 보는데 ‘진짜로 연기해주세요’라는 말을 듣고는 깨달았어요. 내가 위선 떨고 있었구나.” 그때부터 지하 연습실에서 6년간 지내며 연기 연습을 했다. 그런 훈련 덕분인지 배역에 빠져들면 그 인물에서 헤어나오기가 힘들다. <열혈사제>에서 ‘상대역이 누구든 케미가 산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이런 훈련 때문이다. 그는 “거울처럼 살자고 생각했다. 상대가 내성적이면 내성적이 되고, 장난꾸러기면 나도 장난꾸러기가 되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와 작업을 함께 했던 한 관계자는 “주름으로도 연기를 하는 배우”라고 말했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한다는 뜻이다. 맡는 배역마다 외형적으로 큰 변화가 없는 데도 연기만으로도 전혀 다른 인물이 된다. 무표정하거나 살짝 찡그리거나 크게 웃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느낌을 뿜어낸다. 다양한 얼굴이 숨어 있다. 그는 “<미스티> 때를 제외하고는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촬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5~6년 새 주로 악역 제의만 들어오는 것은 아쉽다고 한다. “단막극 <너무 한낮의 연애> 속 인물이 실제 제 모습과 많이 비슷해요. 그런 소시민의 감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좋아해요. 약자의 아픔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고 싶어요.”
실제로 만난 고준은 케빈 리보다는 사람 냄새 나는 황철범에 가까웠다. 털털함을 넘어선 구수함이랄까. “케빈 리랑 전혀 달라요. <미스티> 나가고 2주 동안 집 밖에 안 나왔어요. 사람들이 저를 느끼하게 볼까봐. 하하하.”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이 아쉽고 숲을 좋아하고 한강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아한다고 했다. “한강에서 자전거 타고 농구도 하는데, 그냥 나무 밑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려요.” 마음이 답답하면 ‘의외로’ 클래식을 듣는다. “아니 왜 의외예요. 절 너무 거칠게 보시네. 저와 친한 사람들은 다 알아요, 제가 섬세한 걸. 하하하.”
천천히 걸어왔던 고준의 발길은 이제 빨라지고 있다. 곳곳에서 섭외가 쏟아진다. “<열혈사제>는 더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작품이에요. <너는 내 운명> 같은 작품도 해보고 싶어요.”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며 영어도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당장의 관심사는 연애다. “연애하고 싶어요. 이 봄날. 근데 여성분들 앞에서 긴장을 많이 해서 말로 감정 표현을 잘 못해요. 마음이 천천히 열리는데 마음이 다 열리면 여성분들이 떠나가죠. 아…, 너무 외로워요.” 끝까지 놀라게 하는 고준이다.
■ <타짜-신의 손>(2014) 배우 고준을 눈에 띄게 만든 영화. 많은 이들이 탐냈던 ‘유령’ 역할에 그가 뽑히자 화제가 됐다.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 ‘고준이 누구야’라는 말이 나왔다.
■ <미스티>(2018) 유명세를 안긴 드라마. 피디가 <타짜2>를 보고 케빈 리 역에 그를 떠올렸다. 고준이란 이름보다 케빈 리로 많이 불렸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제대로 받았다.
■ <열혈사제>(2019) 남녀노소 불문 대중의 사랑을 받게 한 드라마. 인기가 전부는 아니지만 작품의 성공은 또다른 기회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 <너무 한낮의 연애>(2018) 고준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막극. 극중 이필용이 자신의 실제 모습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잔잔하고 맑은 캐릭터와 작품의 정서가 좋아 마음 편하게 촬영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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